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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토지』와 맺은 인연 … 경찰서·노인정에 15년째 책 보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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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3일 서울 정릉동 '책마을'에서 이만균(61)씨를 만났다. 그는 15년째 도움이 필요한 전국 곳곳에 책을 기부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23일 서울 정릉동 '책마을'에서 이만균(61)씨를 만났다. 그는 15년째 도움이 필요한 전국 곳곳에 책을 기부하고 있다. [홍상지 기자]

끝내 팔리지 않는 책은 물 속에 담겨 재생지가 되거나 파쇄됐다. 그렇게 단 한 사람에게라도 기억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책을 볼 때마다 이만균(61·사진)씨는 가슴이 아팠다. 책도, 사람도 한 번 태어난 이상 빛을 볼 기회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40년 넘게 책으로 먹고 살아온 이씨에겐 일종의 신념 같은 믿음이다.

매년 1500권 기증하는 이만균씨

2003년 ‘책마을’이라는 상호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은 뒤 이씨는 매년 반품 되거나 기증 받은 책들을 꾸준히 전국 경찰서 유치장과 의경 내무반, 구치소, 노인정, 보육원에 기부하고 있다.

지난 23일 방문한 서울 정릉동 사무실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책 사이로 경찰서와 주민센터에서 준 감사장과 상패가 진열돼 있었다.

이씨가 하는 일은 고속도로 휴게소 서점에 책을 납품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책일’(이씨는 자신이 하는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을 시작한 건 1975년 고교 졸업 직후다. 대입을 포기하고 지인의 소개로 출판사 ‘지식산업사’에 입사했다. 책 영업부터 운반까지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이씨는 “당시 출판사가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처음 출판한 회사였다. 그때 박 작가가 원주에 계셨는데 내가 다른 직원을 태우고 원주까지 찾아뵌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책을 향한 애정은 매해 차곡차곡 쌓여갔다. 팔리지 않아 어두컴컴한 창고에 쌓인 책을 볼 때는 괜스레 안타까웠다. “한 번 히트한 책은 어마어마하게 팔리지만 어둠 속에서 빛도 못 보고 사라지는 책이 많아요. 책도 이왕 태어난 거라면 필요한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읽히고 죽어야죠.”

개인 사업을 시작한 뒤 이씨는 본격적으로 책을 필요한 곳에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 책을 기증한 곳은 친구가 근무하던 성북경찰서다. 이후 알음알음 소개를 통해 이곳저곳 책을 보냈다. 일단 도움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매년 1000~1500권의 책이 새 주인을 만나고 있다. 이씨는 “기부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노인정 어르신도 돋보기를 껴가면서 책을 정말 열심히 보신다”며 뿌듯해했다.

사무실에 있는 여러 상장 중에 책 기증과 관련 없는 상이 하나 있었다. 지난해 5월 길거리에서 흉기를 휘두르던 ‘묻지마’ 폭행범을 제압해 받은 표창장이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라고 감탄하자 이씨는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지 대단한 게 아니다”라며 멋쩍게 웃었다.

글·사진=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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