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중소기업끼리도 싸움 붙이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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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김도년 산업부 기자

김도년 산업부 기자

2014년 4분기 대림산업은 해외 건설 사업에서 3000억원이 넘는 손실을 봤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현지인 고용을 의무화해 공사원가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림산업이 눈물을 머금고 손실을 받아들인 건, 원가가 늘어도 약속한 대금을 받는 것이 도급 계약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원가를 줄여 더 많은 수익을 남기더라도 이는 하청기업의 몫이 된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 상식을 뒤집는 법안이 나와 법률 전문가들을 당황스럽게 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16일 최저임금 상승 등 늘어난 공급 원가 부담을 하청업체가 원청업체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하도급법 개정안에 명시한 것이다. 앞으로 하청 업체가 원청업체에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면 원청업체는 열흘 안에 반드시 협의를 시작해야 할 의무도 생겼다.

이준길 법무법인 지평 고문은 “하청업체가 계약한 돈 이상을 원청에 요구하는 것은 민법상 일이 모두 끝났을 때 미리 약정한 돈을 주도록 한 도급 계약의 본질에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청업체가 원청에 요구할 수 있는 ‘공급 원가’란 개념도 모호하다. 수많은 업종에서 발생하는 재료비나 인건비 등을 시행령으로 정하기도 어렵다.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도 천차만별이라 원가가 늘어난 원인이 어쩔 수 없는 외부 여건 탓인지, 하청 사업자가 더 저렴한 재료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탓인지도 알 수 없다.

원청업체들이 모두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다. 건설업의 경우 주로 원청 역할을 하는 종합 건설사의 98.4%가 중소기업(2015년 기준)이다. 자금 사정이 힘든 중기가 다른 중기에 대금 증액을 요청하는 경우가 더 자주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2010년 이후 제조업 분야 하도급법 위반 사건 중 1차 협력사 이하 업체들의 법 위반 비중이 91.1%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가 더 문제인 것이다.

송정원 공정위 기업거래정책과장은 이에 대해 “최저임금 인상 등 달라진 여건을 도급액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며 “원청업체가 반드시 도급액을 올려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추진한 상생 정책들은 번번이 ‘없는 사람’ 간의 갈등만 부추겼다. 시장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대의만 앞세우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이번 하도급법 개정도 그 연장선이 될까 우려된다.

김도년 산업부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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