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보스니아·코소보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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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가족 내에서 다툼이 벌어졌을 때에는 구성원들이 한번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 보는 시점이 오게 돼 있다. 지난 50여년간 동맹 관계를 유지해 왔다가 최근 몇달간 갈등을 빚어 왔던 유럽과 미국이라는 서구 '가족'에서도 우리는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이 미국의 친구가 아니라 적인 것처럼 행동했던 올해 초로 돌아가 보자. 대륙의 이 두 나라는 러시아와 함께 워싱턴에 대항하는 외교전을 벌였다. 이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전쟁 결의안에 대해선 '노'를, 미국이라는 거인이 가는 길을 막는 데는 '예스'라고 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떠했는가.

미국은 적에게든, 친구에게든 갈 길을 간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프랑스가 거부권을 가지고 있던 안보리에 문제를 넘기기보다는 동맹국들을 규합해 사담 후세인을 뒤쫓으려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보자. 이제 냉정을 유지하며 숙고하는 시간이 왔다. 갑자기 워싱턴은 이라크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해 유엔 본부의 복도를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다.

이라크에서는 놀라운 최첨단 무기들과 정교한 전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전쟁에서 순식간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대단하지만 원격 미사일이나 군사위성은 전쟁 이후 단계에서는 그리 소용이 없다.

냉전 종식 이후 서구의 군사 작전은 프로이센의 유명한 군사전략가인 클라우제비츠가 기술한 대로 "적의 의지를 궤멸시킨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해왔다. 여기에 중심 되는 과제는 언제나 '정권 교체'였다.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작업은 그 다음에 온다. 새 정권을 수립하고 정정을 통제하며 사회 기반시설과 경제를 복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갑자기 유엔으로 돌아온 이유다.

유럽은 어떠한가. 비록 몇몇 주요 국가들은 이라크전에 반대했지만, 이들은 미국이 실패하면 자신들도 얻는 게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유럽 국가들과 서구 전체의 안보 위협은 불량국가와 국제 테러리즘으로부터 나온다.

이런 자유민주주의의 적들은 바그다드를 주목하고 있다. 바그다드의 실험이 실패하면 이들은 힘을 얻게 된다. 바그다드 유엔 사무소 폭탄테러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들의 목표는 미국만이 아니다. 따라서 서구 국가들 간의 갈등에선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독일이 이라크에 개입해야 하는가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개입은 반대"라고 말해 왔지만, 그의 밑에 있는 국방장관은 이미 앞서 나가고 있다. 유엔의 결의안이 있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요청한다면 독일은 도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서구는 이제 '가족 재회'의 단계에 와 있다. 부시 행정부는 가장 관심을 끄는 사안에는 일방주의가 별 역할을 못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테러리즘.보호무역.에이즈와 싸우고, 불량국가를 다룰 때 최대한의 협력은 필수 조건이다. 협력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전혀 없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얻는 게 낫다.

유럽 국가들도 바깥 세계는 협력만을 요구하는 유럽연합의 인자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화는 좋지만 외교라는 비단 장갑 속에 무장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대화는 대화로 끝나 버린다. 영화 '언터처블'에서 알 카포네는 "미소만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미소와 함께 권총도 손에 쥐어야 더 많이 얻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라크 지원 결의안을 통과시키도록 안보리를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유엔이 현재 이라크의 최우선 문제인 안보를 책임질 수 없다는 점을 유럽에 알려야 한다.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의 경험이 말해주듯이 안보 문제는 나토와 같은 누군가가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나서 유엔이 학교나 식수.행정과 같은 문제를 다룰 수 있다.

누군가는 안보를 맡아야 하고, 이는 유엔이 될 수 없다. 나토가 미국의 지휘 아래 이를 맡도록 하라. 또 미국은 우방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의결권주도 갖지 못하는데 어느 누가 기업경영에 참여하려 하겠는가.

요제프 요페 독일 디 차이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