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에 휘둘리지 않는 미 사법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미국 법원이 미국민의 공적이랄 수 있는 9.11 테러 용의자도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처벌이 불가능하다며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을 중지시켰다. 국민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법과 원칙으로만 재판한다는 자세다.

9.11 테러 용의자로 미국에서 유일하게 기소된 자카리아스 무사위 사건을 심리해온 알렉산드리아 연방지방법원의 레오니 브린케마 판사는 13일 갑자기 휴정을 선포했다. 브린케마 판사는 "이날 출두 예정이던 증인 7명에게 정부 측이 심리 중 발언내용을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는 정부의 행동에 대해 "증인이 출두 전에 심리에 미리 참석하거나, 심리 기록을 미리 읽는 행위를 엄금한 재판부의 명령을 심각히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는 피고가 보장받을 수 있는 헌법적 권리에 영향을 줄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며 "사형선고가 나올 수도 있는 사건에서 미 형사사법제도의 순수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과오가 나왔다는 점이 특히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미 법조계는 "미국에서 국민적 분노의 대상인 9.11 테러 용의자에 대해서도 사법부가 여론을 비롯한 외부의 판단에 영향받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서만 재판을 진행한다는 모범을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 미 검찰엔 뼈아픈 결과=브린케마 판사는 "현재로선 재판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재판을 무효(mistrial)로 할 것인지를 검토하는 청문회를 14일 열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검찰 측이 요구한 사형선고를 거부하는 방안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이 무효가 되면 검찰은 5년 가까이 끌어온 기소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한다. 재판이 진행되더라도 사형이 거부되면 무사위는 자동으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게 된다. 어느 쪽이나 검찰로선 뼈아픈 결과다.

◆ 미 검찰 왜 덜미 잡혔나=문제가 된 것은 13일 출두 예정이던 미 연방항공국(FAA) 소속 증인 7명에게 지난 주말 배달된 e-메일 한 통이었다. 미 정부(교통안전국.TSA) 변호인단의 한 명인 칼라 마틴이 보낸 것이었다. 이 메일은 증인들에게 이전 재판에서 검찰 측이 신문한 내용과 앞으로 증언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며 "앞서 다른 증인들이 했던 것처럼 논리가 허술해 보이면 되지 않으니 미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오라"고 요구했다.

이 e-메일이 공개되자 브린케마 판사는 "증인들이 법정에 나오기 전에 미리 정부 측과 입을 맞춰본 셈"이라며 "재직 중 이렇게 악의적으로 법정의 공정성을 훼손한 행위는 처음"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마틴 변호사의 행위는 증인을 감독하고 증언을 짜맞춘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정부가 '기밀' 도장을 찍어 재판부에 보내온 마틴의 e-메일을 공개해 정부에 망신을 주기도 했다.

◆ 무사위는 누구인가=모로코계 프랑스인으로 9.11 테러 한 달 전인 2001년 8월 미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부근의 한 비행학원에서 검거됐다. 당시 비행교관은 그가 보잉 747기의 이착륙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단지 운항 중 조종술만 배우고 싶어하는 걸 수상히 여겨 FBI에 신고했다. 이어 9.11 테러가 터지자 당국은 무사위가 알카에다와 연계해 테러를 준비했다고 추정, 재판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무사위는 알카에다와 테러를 모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9.11 테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