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왜 내가 미국을 통치한다는 음모론은 없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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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딕 체니 부통령을 지칭), 내 지지율이 38%에 불과하오. 그런데도 당신은 이 나라에서 나를 좋아하는 유일한 변호사를 쏘았소."

그러니 지지율이 더욱 떨어질 판이라고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체니 부통령을 향해 엄살을 피웠다. 미국 언론인 모임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그리다이언 클럽(Gridiron Club)'이 11일 마련한 연례 만찬장에서였다.

이날 만찬에선 지난달 사냥을 하다 오발 사고를 낸 체니 부통령을 겨냥한 유머가 줄을 이었다고 워싱턴포스트.AP통신이 보도했다. 올해로 다섯 번째 이 행사에 참석한 부시는 "이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은 린(체니 부통령의 부인)"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내가 통치하지만 나를 움직이는 건 체니이고, 체니를 좌우하는 건 린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부시는 또 "체니나 칼 로브(백악관 부비서실장)가 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음모론이 있는데, 왜 내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음모론은 없는지 정말 화가 난다"고 말해 청중을 웃겼다.

민주당의 인기 있는 흑인 상원의원인 바락 오바마는 기자들과 함께 춤과 노래를 곁들여 풍자 무대를 꾸몄다. 오바마 의원은 "체니 부통령, 나는 지금 당신에게서 30야드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그 스포츠(사냥)만은 안 돼요"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체니 부통령은 헤드 테이블에 앉아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체니는 2년 전 이 만찬장에서 존 케리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풍자한 적이 있다. 당시 케리가 얼굴의 주름살을 없애기 위해 보톡스 주사를 맞고 있다는 소문을 겨냥, "보톡스는 독성이 강한 보툴리누스균과 관련이 있고, 이 균은 가공할 생물무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찾고 있는 대량살상무기(WMD)가 바로 그거"라고 꼬집었던 것이다.

그리다이언 만찬에는 회원들이 초청하는 각계 유명인사 600여 명이 참석한다. 행사의 백미는 주요 정치.사회 현안을 춤과 노래, 연극으로 익살맞게 풍자하는 무대다. 지도자의 덕목 중 유머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상궤를 크게 벗어나는 일은 없다. '그슬리되 절대 태우지 않는다(singe, but never burn)'란 철칙이 있기 때문이다. 풍자는 하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 그리다이언 클럽=1885년 설립된 미국의 중견 언론인 클럽이다. 현재 회원은 66명. 연례만찬 개최가 유일한 행사다. 만찬에서 오간 대화는 기사화하지 않는 게 관례이지만 재미있는 얘기들은 며칠 뒤 새 나온다. 모임은 1943년 이래 워싱턴 시내 캐피털 힐튼호텔에서 열려 왔다. 이 호텔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 경호를 위한 특별시설까지 갖춰져 있지만 내년부터는 개최 장소가 다른 곳으로 바뀔 예정이다.

*** 바로잡습니다

3월 14일자 2면 '미국의 유머 정치' 기사에서 워싱턴의 중견 언론인 모임인 Gridiron Club의 한글 표기가 틀렸습니다. 그리디론 클럽이라고 썼는데 그리다이언 클럽으로 바로잡습니다. Gridiron은 격자 모양의 그리드(grid)와 쇠를 의미하는 아이언(iron)이 합쳐진 단어로 '석쇠'를 뜻합니다. 이 클럽은 연례 만찬에 대통령을 비롯한 거물들을 초청해 사회 현안을 풍자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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