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우린 한배 탄 것" 고건 "국민 모두 탄 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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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정동영 당의장(오른쪽)과 고건 전 총리가 12일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정현 기자

"우리가 한배를 탔다는 것은 대한민국호에 국민 모두가 함께 탔다는 뜻이다. 큰 배에서 선실이 같고, 층이 같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도와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정 의장은 "참여정부 앞에 거친 파도가 있다. 초대 총리께서도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본다"고 했다.

고 전 총리는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 정 의장의 지방선거 협조 부탁을 선명하게 거절했다. 결국 열린우리당이 추진하던 선거연대는 무산됐다. 이에 따라 열린우리당은 '고건 효과' 두 가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 하나는 호남에서 민주당을 압박할 수 있는 효과다.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는 광주시장과 전남지사를 고 전 총리의 협조로 공략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그게 거품이 된 것이다. 또 하나는 고 전 총리와의 연대로 한나라당 지지율이 높은 수도권에서 호남 출신 유권자를 끌어들이려는 효과가 사라졌다.

2년 전 고 전 총리는 현직 총리로서 정동영 의장과 함께 대통령 탄핵 사태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2시간에 걸친 이날 대화에서 고 전 총리는 정 의장과 현격한 입장 차를 드러냈다.

▶정 의장="고 전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빚어진 과도기를 잘 관리했다."

▶고 전 총리 ="탄핵은 해소됐지만, 리더십 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정 의장 ="총리가 평화.개혁.미래세력 연대에 힘을 합쳐야 한다. 한나라당의 수구세력과 맞서야 한다."

▶고 전 총리="(내가 주장해 온) 중도.실용.개혁세력의 연대는 특정 정당.정파 차원의 연대가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창조적 실용주의의 가치와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폭넓게 협조해야 한다. 지방선거와는 관계없다. 지방 자치에 중앙 정치가 너무 깊게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다."

고 전 총리의 거절은 그가 선거 이후 벌어질 수 있는 정계 개편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가 내세운 '중도.실용.개혁세력'의 연대는 열린우리당.민주당.국민중심당과 여러 세력을 아우르는 구조다. 만일 고 전 총리가 정 의장의 선거연대에 협력한다면 호남에서 맹주 다툼을 벌이고 있는 민주당이 등을 돌릴 게 뻔하다. 또 충청권에 둥지를 튼 국민중심당도 고 전 총리에게 의지하기 어렵게 된다.

고 전 총리는 차기 대선주자로서 정 의장과 경쟁 관계에 있는 점도 고려한 것 같다. 두 사람은 전북이 고향이고 전주북중의 선후배 사이다. 따라서 전북과 호남의 대표권을 놓고 대선 가도에서 결국은 한 번 부딪쳐야 할 관계다. 고 전 총리로선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도우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만 최근 완만한 하강 추세를 그리는 지지율을 떠받치기 위해 고 전 총리는 정 의장과의 이벤트를 피할 필요가 없었다. 고 전 총리는 지방선거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진 않더라도 선거 뒤의 이합집산을 겨냥한 물밑 행보는 계속할 것이다. 13일 고 전 총리를 지지하는 전문가 집단의 정책모임인 '미래와 경제'가 발족하는 것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다.

채병건 기자<mfemc@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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