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찰스 브론슨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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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별이 졌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과묵하면서도 의리있는 모습을 보여준 배우 찰스 브론슨. 그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별세했다. 81세

미국 로스앤젤레스 세다스 시나이 병원은 이날 "브론슨이 사망했으며 사인은 폐렴"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브론슨은 이미 2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심하게 앓아왔으며 지난달 초부터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본명이 찰스 번친스키인 브론슨은 펜실베이니아주의 탄광촌에서 리투아니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5남매 중 다섯째였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곧바로 광부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그나마 가족 중 고교 졸업자는 브론슨뿐이었다.

암울한 나날을 보내던 젊은 브론슨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숨기고 살아야 했던 '끼'를 펼칠 수 있는 기회였다. 공군 기관총 사수로 참전했던 그는 제대 후 군의 지원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연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후 1949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플레이하우스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던 브론슨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51년. 평소 그를 눈여겨 보던 교수 한명이 영화감독 헨리 하더웨이에게 그를 추천한 것이다. 브론슨의 연기가 마음에 든 하더웨이 감독은 그를 '유 아 인 더 네이비 나우'에 즉시 캐스팅했다. 은막 데뷔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뒤이어 '더 모브' 등에 출연하며 연기력은 인정받았지만 인기를 얻진 못한 것. 그러던 그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자신의 혈통을 배반(?)하면서부터였다.

'발칸의 후예'였지만 동양적인 외모를 가졌던 브론슨은 54년작 '아파치'를 시작으로 몇 편의 영화에서 아메리카 인디언 역할을 맡았고 이 영화들을 통해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이 때까지 번친스키라는 본명으로 활동하던 그가 브론슨이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 그는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의 정세를 고려, 미국인에게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연상시킬 수 있는 본명을 버렸다.

이름을 바꾼 덕이었을까. 브론슨은 60~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서부영화의 고전'으로 불리며 아직 국내 팬들의 기억에도 남아있는 영화 '황야의 7인'에 출연한 것도 60년의 일.

일본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패러디한 이 영화에서 브론슨은 베르나르도 역을 맡아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율 브리너.제임스 코번.스티브 매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역시 국내 흥행에 성공했던 '대탈주'도 63년작이었다.

70년대에는 영화 '데스 위시'가 TV 시리즈로까지 제작되면서 안방 극장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유럽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던 그는 71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로 뽑히기도 했다.

99년 은퇴 전까지 모두 1백여편의 영화에 주연급으로 출연했던 브론슨. '천상 배우'였던 그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연기는 내가 해본 일 중에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마 나는 계속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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