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인사이드 피치] 고수 앞엔 묘수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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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야구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다른 야구 팬들처럼 결승전 중계가 있는 날이면 TV 앞에 앉아 방송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그때 하일성 KBS 해설위원은 그날 경기가 결승전임을 지적하면서 꼭 이런 말을 했다.

"네, 두팀은 모두 결승까지 올라온 강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누가 상대를 얼마나 두들기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실수하지 않느냐, 여기서 승부가 갈라질 것으로 봅니다."

야구 등 스포츠도 그렇고, 바둑.장기.스타크래프트 등 다른 '겨루기'도 그렇지만 고수(高手)들의 승부는 현란한 기술이나 작전에 의해 갈라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번뜩이는 기술은 한 수 아래의 상대를 다룰 때 발휘된다. 고수와 고수가 맞부딪치면 그렇지 않다. 하일성씨의 지적처럼 '누가 더 평상심을 유지하고, 실수하지 않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야구는 다른 종목에 비해 많은 작전이 시도되는 경기다. 9이닝 동안 투수와 포수가 주고받는 '사인'을 작전의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벤치로부터 주루코치에게, 주루코치로부터 주자와 타자에게 전달되는 각종 수신호까지 따지면 손으로 꼽을 수 없는 정도가 된다.

미국의 야구 역사가 폴 딕슨은 그의 저서 '감춰진 야구의 언어(The hidden language of baseball)'에서 "한 게임에서 전달되는 사인은 1천개가 넘는다"고 밝힌 바 있다(헉! 1천개라니!).

이처럼 많은 사인이 오고 가면서 상대를 속이고 허를 찌르기 위한 작전이 구사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프로야구는 고수들끼리의 경기라서 정작 그런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다.

고교 야구 예선전이 아니라 하일성씨가 말한 '결승전' 수준의 경기로 고급화된 것이다. 그래서 '속이기'보다는 '속지 않기', '무너뜨리기'보다는 '무너지지 않기'가 현명한 선택이 됐다. 투수코치들도 '마구를 던지는 것'보다 '실투(失投)를 줄이는 것'을 강조한다.

프로야구는 지난 22년 동안 성장했다. 초창기의 '수준 높은 실업 야구'가 아니다. 이제 모든 부분이 시스템화됐고 선수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로 자리잡았다.

투구와 타격은 물론 베이스러닝부터 상황에 따른 수비 위치 이동까지 다양한 부분이 전문화됐다. 선수들은 자신의 기능과 주어진 역할을 언제, 어느 때 수행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우리도 경기의 흐름을 이해하고 준비한다. 우리는 경기를 치르는 당사자들 아닌가. 경기가 끝나고 보면 좋았던 작전은 우리가 '억!'하고 깜짝 놀라는 작전이 아니라 '음…'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작전"이라고 말한다.

'지금쯤 이런 작전이 나오겠지' '누가 누구로 교체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준비했을 때 그런 작전, 그런 교체가 나와야 가장 이상적이라는 말이다. 선수들이 이런 입장인데 그들이 납득할 수 없는 기용, 이해할 수 없는 교체가 과연 수준 높고 비상한 작전일까? 허를 찌르는 감독만의 묘수(妙手)일까?

프로야구에 묘수는 없다고 본다. 가장 평범한 것,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그래야 진정 '고수들의 사회'가 될 수 있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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