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소설」의 뜻|정규웅<중앙일보 출판기획위원·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면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소설로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이 있다. 5부작으로 예정돼 있는 이 대하소설은 현재 2부까지가 5권으로 출간돼 있고 지금 3부가 연재중이니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아직 내릴 단계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진작부터 화제에 오를만한 여러 가지 소지를 안고 있다. 소설로서의 재미도 재미려니와 여순 반란사건 이후 6·25동란에 이르기까지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 빨치산 투쟁이 인간사적인 측면에서 생생하게 파헤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가리켜 어느 원로급 문인이 <빨갱이 소설>로 지칭했다하여 일부 문인들 사이에서 심심치않게 이야깃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말 그대로 <빨갱이>니까 <빨갱이 소설>로 지칭했다 해서 큰 잘못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빨갱이 소설>이라는 표현의 저변에는 등장인물이 <빨갱이>라는 이유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니고 작가의 시각이 수상쩍다는 이유가 깔려 있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
즉 이 작품을 <빨갱이소설>로 지칭한 것은 최근 또 다른 원로급 문인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민중문학을 사상적으로 불온한 것으로 치부한 발언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민중문학의 논리가 아직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못하고 따라서 설득력이 약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중문학이 가지는바 계층적 의미를 사시적인 시각으로만 파악하려는 것은 국수주의적 발상이요, 쇼비니즘적 사고방식일 뿐이다.
특히 비록 사석에서의 발언이라지만 <빨갱이 소설>이라는 표현 속의 <빨갱이>의 구시대적 의미를 돌이켜 볼 때 그 시대착오적인 의식에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로 온갖 고초를 겪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로 암흑 속에서 살아야 했던가. 권력자들이 즐겨 부가의 보도처럼 내휘둘렀던 <빨갱이>라는 표현이 문인에 의해, 문인을 또는 문학작품을 매도하기 위해 씌어졌다면 이건 슬프다기보다 차라리 코미디라고나 해야할 것 같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문단과 학계에서는 「잃어버린 반쪽 문학을 되찾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우리 나라 현대문학사를 완벽하게 새로 쓰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정○용 김○림으로 이름조차 잃어버렸던 정지용 김기림은 이름을 되찾았고, 비록 공식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지만 납북이든 월북이든 북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철저하게 금기시 돼왔던 6·25이전 일부 문인들의 이데올로기와 관계없는 소설집·시집들이 손쉽게 독자들의 손에 들려지게 되었다.
「민중문학은 불온하다」는 사고방식이나 『태백산맥』을 <빨갱이 소설>로 보는 시각의 측면에서라면 최근의 그같은 상황은 변혁도 이만 저만한 변혁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혁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다. 그것을 변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역사의 흐름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반드시 옳은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면 옳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역사를 바로잡는데는 붓끝이 일조를 할 수 있다. 곧 「붓끝은 세상을 변모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붓끝을 무기로 삼는 문인들이야말로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안목을 가져야하지 않겠는가.
이제 <빨갱이 소설>은 <빨갱이>가 등장하는 소설로만 인식돼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