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추석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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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봉황 문양 포장의 수삼 또는 인삼. 현금 1백만~2백만원. 멸치. 기억도 나지 않는 시시한 것.

역대 대통령이 돌렸던 추석 선물 목록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선물이) 전혀 없다. 그러다 정을 잃어버릴 수 있다"면서 민주당 정대철 대표가 돌이킨 '추석의 추억'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올해도 추석 선물로 호남의 복분자 술과 영남의 한과를 준비해오던 참이라고 한다.

鄭대표는 정말 복분자라도 한병 받아야겠다는 게 아니라 민주당 내 신.구주류 간 갈등을 풀기 위해 盧대통령이 작은 일에라도 좀 신경써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鄭대표의 발언은 듣기에 썰렁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추석이 영 썰렁하다고들 하는 판에-.

왜 거의 다들 이번 추석이 썰렁하다고 할까. 뭐니뭐니 해도 일단 추석 경기가 없다는 얘기다. 시장.백화점.음식점이 손님들로 웬만큼 붐비고 교통이 막힐 만큼 사람과 물건이 돌아다니면, 비록 평소 우리 사회에 큰 갈등이 있더라도 추석이 썰렁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추석 경기가 나쁘다 보니 요즘 사회.정치 상황이 더 썰렁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추석 경기의 실종은 몇가지 얼굴을 지녔다. 우선 지금의 불황은 경기 순환적이라기보다 구조적이다. 호황 끝에 불황이 닥치게 마련이고 불황 뒤엔 다시 호황이 온다는 식으로 볼 불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생산 능력이 꽉 차 불황이 온 것도 아니고, 경기가 워낙 바닥이라 해서 수요가 살아날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금리를 더 내리는 등 경기를 부추길 여지도 거의 없다. 지금의 불황은 새 산업, 새 공장에 대한 투자가 별로 일어나지 않아 경제에 새 살이 붙도록 하지 않았기에 생긴 불황이다.

외국 기업도 유치하고 국내 기업도 여기서 투자하도록 해 생산력을 높이고 거기서부터 소득도 늘려 소비가 경제를 다시 받치도록 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왜. 그간 생산적 대안보다는 소모적 갈등이 판을 쳤기 때문이다. 무슨 소모적 갈등이냐고. 더 말하기도 싫다. 추석 분위기 더 썰렁하게 할 일 있는가.

'명절 떡값'이 오가는 대신 '비자금 수사'가 한창이라는 것도 올해 추석이 과거와 영 달라지게 만든 큰 요인이다.

鄭대표는 봉황 문양 포장의 인삼에서부터 기억도 나지 않는 시시한 것까지 대통령 선물을 예로 들었지만, 추석 풍속도가 달라져 온 것은 비단 대통령 선물뿐만이 아니다. 아직도 멀었다고는 하지만 정치권이 대기업에 손 벌리는 일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상 그간 추석 경기를 띄운 것은 결국 기업의 씀씀이였다. '떡값'을, 선물을, 보너스를 기업이 풀지 않았으면 추석 경기는 없었다. 이제 그런 추석 경기는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불황 속의 기업이 그럴 여력도 없는 데다 비자금에 잘못 걸리면 정치인이든, 기업이든 끝장이다.

여기다 이제는 추석이라 해서 소비를 특별히 크게 늘리지 않는 생활 패턴도 추석 경기를 평이하게 만들고 있다. 추석이라고 새 옷 사입고 못 먹던 음식 한 상 차려 먹는 집은 거의 없다.

이래저래 이번 추석은 썰렁한 가운데 추석 연휴가 수.목.금 사흘이라 예년보다 더 오래 쉬는 직장.상점.음식점이 많을 것이다. 마침 주5일 근무 시절도 다가온다지만, 썰렁하게 쉬는 날만 늘어나서야 무엇 하겠는가.

'떡값'의 추억은 이제 묻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기업의 정상적인 씀씀이로도 명절과 주말이 썰렁하지 않도록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추석 연휴도, 주5일 근무도 별 볼 일 없다.

김수길 기획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