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예향 항주에 끝없는 관광객 물결-청강 김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드디어 꿈에 그리던 중국제1의 관광도시요, 예술의 본향인 항주를 찾는 날이 왔다. 우리 일행 4명(내외와 처제부부)은 87년 9월10일 특급열차로 상해를 출발한지 3시간만에 대망의 항주역에 도착했다.
보슬비 내리는 역두에는 각종의 차량이 손님을 부르느라 아우성이다. 우리는 바로 유명한 서호 변의 새교반점(신초호텔)에 풀었다.
역에 마중 나온 전길일군(26)은 나이에 비해 상당히 숙성해 중국예술에 대한 조예가 대단했다. 나는 그가 항주 사람이라 언어의 소통을 걱정했지만 그는 유창한 표준어(북경 말)로 말해 더욱 친근해졌다. 뿐만 아니라 전군은 매우 쾌활하고도 사교적인 청년으로 우리에게 친절을 다했다.
이날 저녁은 천향누(대식당)에서 항주의 모교(보인대) 교우회 회장단간부들의 초청으로 대접을 받았다.
9월11일, 아침 일찌기 전군 등 항주 청년들의 안내로 서호로 향했다. 남송의 고도인 항주성 서평에 잔잔한 물결을 간직한 서호 변의 그 아름다운풍광은 필설로써는 다할 수 없었다. 과연 중세(원대13세기)때 중국에 여행한「마르코·폴로」가 말한 바와 같이『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항(소주·항주)이 있다』고 한 항주땅을 거니는 순간의 행복감은 그야말로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돌아 항주 반점(항주 호텔)·신강 박물관·항주 도서관·악비 기념관 등의 명소를 지나 항주 제1의 고찰 영은사(링인쓰)에 도착했다. 사원입구의 고색이 창연한 석조불상과 석조탑들은 이 고찰의 역사를 말하는 듯 했다. 들어가고 나오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홍수, 토산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의 아우성 속에 우리는 밀리고 밀리면서 앞으로 나갔다.
다음 날은 옥천원(위찬윈)을 찾았다. 이 옥천원에는 어악원이란 금붕어 못이 있는데 차를 마시면서 노는 물고기를 즐기는 운치 또한 예향의 흥취가 아닐 수 없었다.
벽에는「어악인수」(고기를 즐기는 사람은 수 한다)라는 글이 찾는 사람들을 맞았다.
우리는 용정다원, 그리고 근대 중국 창??의 세계적 명인 매난방의 별장을 지나「천외루」라는 멋진 식당에서 호화로운 중국요리로 점심을 들었다.
다음은 호포천(후포찬) 기념관에서 우하죽(「우하죽」·연근을 갈아만든 죽)을 맛보고, 『열 숟가락을 먹으면 10년을 더 산다』고 하는 전군의 설명을 듣고 한바탕 웃었다. 가는데 마다 마주하는 주황·주홍 주·황·흑색으로 전아하게 장식한 중국특유의 건축미와 흘러나오는 멋진 중국 남녀의 고전악은 이국 나그네의 정서를 한껏 북돋워주었다.
이어 남송의 고도 Kinsai(경사즉 임안)를 입체 모형으로 만든「남송항성풍정도」의 진열 실에 들어선 우리는 수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필름을 갈고 또 갈고 하면서….
완연히 2세기 남송의 서울 항주성(고명은 무림전당)의 모든 상하계급의 생활상을 한눈에 보는 것 같았다. 예술가인 나의 가슴은 너무 벅차고 손이 떨리기도 했다. 과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항이 있다고 한 말을 다시 음미해 볼만했다.
다음날은 오직 50년을 꿈에만 그리던 서냉인사(씨링인써)를 방문했다.
이 중국 전각예술의 메카인 서냉인사는 한국의 여러 동방예술을 흠모하는 작가들이 한번 가 보기를 학수고대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전군과 3인의 항주청년들의 안내로, 먼저 서 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건너가 아름다운 인공과 자연미를 감상하고 바로 서냉인사가 있는 호 변으로 건너갔다.
멋진 원형의 대문을 들어서니 청록색의 증국풍 지붕에 주홍색의 기둥이 도열하고 있는 각종 기념 진열관이 도처에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특히 갈색의 목판에다 백록색으로「오창석 기념관」이라 새겨 달아놓은 현판이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위대한 작가 오 선생에게 절을 하면서 들어갔다. 그의 초상과 각종 전각예술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양현정(양셴팅)으로 발을 옮겼다.
청대 중기이후 근대에 이르는 금석전각의 대가 등완백·오대징·오양지·조지겸, 그리고 이서냉인사의 창시자 오창석의 초상화가 정중하게 진열되어 먼길을 찾아온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홍설경을 지나갔다. 녹색의 취죽이 귀엽게 돌층계 옆에 고개 숙이고 있는 곁 작은 못 돌벽에는「인천」이란 글이 새겨있다. 어디를 가나「인」자였다. 인장 즉 전각 예술의 세계를 알리는 것이다.
어느 방에는 전황·??혈 등 고귀한 석인재가 수없이 진열돼 내 눈을 어지럽혔다. 다른 방에서는 노인 전각가들이 앉아서 주문 받은 각인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보통 도장 크기의 잡혈석 하나가 4천달러를 호가, 금값보다도 비쌌다.
오후에는 저 유명한 육화탑(류허타) 봉우리에 올랐다,
육화탑은 서기970년 송대조때 창건한 13층 목조탑이다. 탑정상에 올라서니 앞에는 유유히 흐르고 있는 전당강, 많은 남중국의 명가들을 산출한 젓줄인 전당강이 펼쳐졌다. 전군은 원 4대가 중의 한사람인 유명한 황대치(공망)도 여기서 살다간 대가라고 알려주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