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코끼리' 개방 15년 인도를 가다 (2) 돈이 곧 카스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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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의 타지마할 호텔 앞에 인도인이 붐비고 있다. 이 호텔의 대형 연회장에서는 밤늦은 시간에 상류층의 사교 모임이 자주 열린다. 뭄바이=장세정 기자

#1 2월 25일 밤 뭄바이 시내 타지마할 호텔. 초특급인 이 호텔은 외국 기업과 인도 부유층이 밀집한 나리만포인트에 위치한 때문인지 자정이 임박하자 로비는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대형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30~40대 남녀 1000여 명이 뿜어내는 열기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다과를 들며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과거 영국 귀족들의 궁정 연회를 방불케 했다. 불청객인 기자에게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지금은 사교 모임 중입니다. 초청장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습니다."

#2일요일인 이튿날 뭄바이 중심가에 위치한 쇼핑몰 '빅 바자르'. 현대자동차 액센트(베르나의 현지 모델명)를 몰고 온 40대 가장이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매장으로 들어섰다. 이들은 구찌.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명품 브랜드가 가득한 매장에서 쇼핑을 즐겼다. 영국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대형 사진이 걸린 아디다스 스포츠용품 매장과 노키아 휴대전화 매장에는 깔끔한 옷차림의 20대 젊은이들이 제품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개방 경제 15년이 인도의 사회 지도를 새로 그리고 있다. 부가 중시되면서 카스트(용어설명 참조)의 굴레를 벗어던진 중상류층의 출현이 그것이다.

◆ 인구 11억 중 3억 중산층="인도의 중산층은 미국 전체 인구와 맞먹는 3억 명에 이른다." 인도에서 만난 관리와 기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물론 구매력은 미국 중산층에 미치지 못할 테지만 시장이 그만큼 두텁다는 자랑이었다. 인도에선 어느 정도 돈을 벌어야 중산층으로 분류될까. 인도 외교부 관계자는 "한 달에 1만5000~2만 루피는 벌어야 한다"고 귀띔했다. 한국 돈으로 고작 33만~44만원이다. 그러나 이곳 물가가 한국의 20% 수준이어서 실질적인 구매력은 높은 편이다.

사회주의 폐쇄경제가 지배했던 1991년 개방정책 이전에는 하향 평준화된 삶이 일반적이었으나 지금은 경제성장 덕에 소비 행태도 고급화하고 있다. 도승환 코트라 첸나이 무역관장은 "유대인.중국인과 더불어 과거 세계 3대 상인으로 불렸던 인도인이 돈맛을 다시 알게 됐다"고 말했다.

◆ 경제력이 신분을 바꾼다=인도가 자랑하는 세계적 문화유산 타지마할(아르라시 소재)에서 관광안내원으로 일하는 파이즈(25). 그는 "돈과 번영을 상징하는 여신인'마하 락쉬미'를 숭배하는 힌두교도가 많다"고 말했다. 현세보다 내세(來世)를 중시해온 힌두교의 전통적 인생관이 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부를 좇는 것은 힌두교도만이 아니다. 뭄바이의 부유층 밀집 지대에 위치한 자이나교 사원. 지난달 25일 찾아간 이 사원 마당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이 펼쳐졌다. 뉴델리 인근에 있는 노이다 공단 내 LG전자. 자신을 시크교도라고 밝힌 이 회사의 프리트 두갈(35) 차장은 "요즘 젊은이들은 모두 돈과 성공을 열망한다"고 말했다.

인도 사회의 뿌리 깊은 폐습 카스트 제도는 47년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아직도 농촌에선 신분이 다르면 결혼조차 하기 어렵다. 다행히 개방정책 덕분에 도시 지역에선 카스트의 존재 의미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한 인도 사람은 "가장 높은 계급인 브라만도 바이샤(상인 계급) 출신의 부잣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경우가 요즘은 흔하다"고 말했다. 천민 계급 출신이면서 인도 최대의 민간 기업을 일군 릴 라이언스 그룹의 창업자 디루바이 암바니는 신분 상승의 모델이 된 지 오래다.

뉴델리.첸나이=장세정 기자

◆ 카스트(caste)=기원전 15세기쯤 아리안족이 인도로 들어온 뒤 약 3000년 동안 인도 사회에 뿌리 내린 신분제도. 인도인은 이 제도를 바르나(varna)라고 했으나 식민지 시절 영국이 카스트로 바꿔 불렀다. 신분은 네 계급으로 나뉘는데 브라만(사제)이 가장 높다. 그 다음은 크샤트리아(군인.관료), 바이샤(상인.농민), 수드라(노예)순이다. 시골에서는 아직도 '불가촉 천민(untouchable)'이라고 불리는 최하층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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