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에세이] "인종차별은 절대 안돼" 거물 정치인들 거리행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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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6일 쌀쌀한 날씨 속에 프랑스 전역에서 대규모 집회와 거리 행진이 벌어졌다. 13일 유대인 혐오주의자들에게 납치돼 참혹하게 고문당한 뒤 숨진 유대인 청년 일랑 알리미(23)의 억울한 희생을 기리는 행사였다.

파리에서만 경찰 추산으로 3만3000여 명이 모였다. 집회와 행진을 주도한 프랑스 유대인대표평의회(CRIF)는 참가 인원이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파리 외에 리옹과 보르도를 포함한 일부 지방 도시에서도 같은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근래에 보기 드물게 프랑스의 좌우파 유력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집권 대중운동연합(UMP) 총재이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 중도우파 정당인 프랑스 민주동맹(UDF)의 프랑수아 바이루 총재, 제1 야당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제1 서기가 거리 행진의 맨 앞에 섰다. 장 루이 드브레 의회의장과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 필리프 두스트 블라지 외교장관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 정치인 외에 장 마리 뤼스티제 추기경과 프랑스 민주주의 무슬림회 인사들도 행진에 참가, 이번 사태를 규탄함으로써 종교를 초월한 연대를 보여줬다.

블라지 외교장관은 이날 행진에 참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모든 프랑스인은 종교와 피부색에 상관없이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오늘 거리에 나와 행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뤼스티제 추기경은 "이번 사건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프랑스의 명예를 위해 참가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지도층이 모두 나서 인종.종교 간 차별.증오를 없애자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무슬림 청년들의 대규모 난동이 벌어진 뒤 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 대우를 반성한 그들로선 이번 유대인 증오 살해 사건은 큰 충격이다.

"유대인은 안 된다" "무슬림은 안 된다" 식으로 서로 간의 미움이 확산하는 순간 프랑스가 자랑해온 국가 통합이 바로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을 이들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다민족 국가다. 그래서 특정 인종이나 종교를 겨냥한 공격은 용납해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다. 이런 행위는 국가 근간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특히 인종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금기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경덕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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