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조백일장2월] "돌아가신 아버지 시조창이 그리워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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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여고 교정에서 만난 문학소녀 같았다. 2월 장원으로 뽑힌 박연옥(46.사진)씨는 결혼 생활 20년을 넘긴 베테랑 주부지만 문학 소녀의 감성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처음 응모했어예. 기대 같은 건 전혀 없었고예."

기자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띄엄띄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수줍음 뚝뚝 묻어나는 문학 소녀의 모습이다. 첫 응모라. 쉽지 않은 기록이다.

중앙 시조백일장은 시조 시단에서 인정하는 가장 어려운 등단 코스다. 한 해 한 번 심사하는 게 아니라 연중 심사를 한다. 수십 번 떨어져도 꿋꿋이 재응모하는 지망생이 숱한 건, 중앙 시조백일장으로 등단하면 문단에서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첫 응모에 장원이라, 어떤 비결이 있으리라.

"혼자 공부했어예. 시조가 그냥 좋아서…."

노력이 남달랐다. 경남 통영에서 시조 관련 서적을 사려고 서울의 서점을 하루 일정으로 오르내렸다. 유명 시인의 시조집은 물론, 창작법 이론서 등도 눈에 띄는 대로 샀다. 그리고 혼자 좋은 작품을 베끼고 자신의 작품을 써보고 주위 사람에게 보여줬다. 그 가운데엔 통영의 시조시인 서우승(60) 씨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한 것 같았다. 최초의 감흥 같은 게 없다면 이와 같은 열정은 흔치 않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옛날 약주 한 잔 걸치면 꼭 시조창을 하셨거든예. 그땐 그 소리가 참 싫었는데…. 언제부터 그 가락이 자꾸 귀에서 맴돌더라고예."

어릴 적 들었던 선친의 시조창을 잊지 못했다고 털어놓을 때 그의 눈엔 이슬이 맺혔다. 통영에 사는 주부를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그의 선친 덕분이었다. 당선 소식을 알렸던 24일 그는 서울 오빠 집에 있었다. 그날은 선친의 기일이었다.

손민호 기자



형식 잘 지키며 삶의 모습 담아내

심사위원 한마디

"어머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요."

심사를 할 때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시조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는 작품이 의외로 많다. 시조 형식은 결코 어렵지 않다. 우리가 흔히 나누는 대화를 생각해보자. 딸이 어머니에게 "엄마 나 아파요"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물을 것이다. "어디가?" 그러면 딸이 "머리가요" 어머니는 다시 묻는다. "어떻게?" 그러자 딸은 "깨질 듯이요." 이런 대화를 생략하고 딸은 한 번의 말로 어머니에게 말할 수 있다. "어머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요."

말하자면 우리말의 언어구조는 대개 네 걸음이면 완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 네 걸음이 세 번 반복(초장.중장.종장)되는 것이 시조의 형식이다. 초장과 중장은 동일하게 반복되고 종장에서는 변화가 일어난다. 첫걸음은 3자이고 둘째 걸음은 5자 이상이 되어야한다. 동일한 반복에서 오는 단조로움을 막고 긴장과 이완의 효과를 동시에 거두기 위해서다.

3(4).4.3(4).4의 자수로 초장과 중장을 얘기하는 것은 우리말의 한 걸음이 조사까지를 포함하여 석 자나 넉 자가 많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끝나는 듯 이어지도록 연결해야

그런데 초장과 중장, 중장과 종장의 연결은 어떤 것이 가장 좋을까. 네 걸음으로 일정하게 맞추면 장의 연결이 매끄럽게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조롭게 된다.

잘 알고 있는 황진이 시조 중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보내고 그리는 정은…"에서 "제 구태여"의 묘미를 생각해보자. 앞과 뒤에 걸리면서 서로 전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다. 중의적인 효과까지는 아니더라도 끝나는 듯 이어지도록 연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박함과 시의 탄력

2월 장원작'자전거를 타며'는 형식을 잘 지키고 있으며,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박함이 엿보인다. 은빛 바퀴에 감기는 한때의 동심을 우리 삶의 모습으로 잘 형상화했다.

'일몰(日沒)'은 단시조임에도 노을을 사내에 비유해서 차분하게 그 의미를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중장에서 하늘의 중얼거림을 삽입한 것이 시에 탄력을 준다. 장의 연결에서는 때로 대화나 독백 등의 지문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이하역 산국(山菊)'은 산국의 이미지를 실감 있게 그려냈다. '와락'이 놓인 부분을 음미해보자.

김혜진의 '하늘가마'와 이규빈의 '눈'은 동심을 잘 그려낸 점이 좋았으나 가벼워 시의 깊이가 부족했으며, 신종범씨의 작품은 과거형 시제 남발이, 장중식.강현남씨의 작품은 다소 관념적인 표현들이 문제가 되었다.

<심사위원: 유재영.이지엽>



응모안내=매달 20일쯤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 매달 말 발표합니다. 응모 편수는 제한이 없습니다. 해마다 매월 말 장원과 차상.차하에 뽑힌 분들을 대상으로 12월 연말장원을 가립니다. 연말장원은 중앙 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자(등단자격 부여)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매월 장원.차상.차하 당선자들에겐 각각 10만.7만.5만원의 원고료와 함께 '중앙 시조대상 수상작품집'(책만드는집)을 보내드립니다.

보내실 곳=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 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우:100-759), 전화번호를 꼭 적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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