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민 삶과 법집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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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왜 사전경고 한마디 없이 애써 지은 막사를 다짜고짜 부쉈습니까.』
『법은 지켜져야 합니다. 불법 건물을 묵인할 수 없어요. 또 올림픽성화봉송로인 경인고속도로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라 미관상 좋지않고요.』
9일 낮 경기도 부천시청 도시정비국장실에서는 부천시관내 고강동에 임시막사를 짓고 이주하려던 서울 상계동철거민과 이들이 허가 없이 지은 불법건축물 임시막사를 강제철거해버린 시청측간에 팽팽한 입씨름이 벌어졌다.
땅은 샀으나 당장 집지을 돈은 없으니 오는 6월까지만 비닐로 임시막사를 지어 살게 해달라는 것이 철거민들의 호소.
그러나 시청측은 불법건축과 올림픽성화봉송로 미관저해를 이유로 끝까지 불허 자세.
주민들은 불법건축 부분에선 전적으로 수긍했으나 성화봉송로 미관저해이유엔 즉각 반발을 나타냈다.
『법도 좋고 미관도 좋지만 애써 자립하려는 철거민들의 노력을 이렇게 꺾을 수 있습니까.』
철거민 대표의 일리 있는 항변에 시청공무원들이 오히려 난처한 표정이 됐다.
철거민 대표들은 다시 정태수시장을 만나 선처를 호소했으나 『법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한 협조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확인하는데 그쳤다.
지난해 4월 상계동철거지역에서 명동성당구내로 옮겨 천막을 치고 9개월 넘게 공동생활을 해온 39가구 철거민들은 구랍28일 명동성당측과 서울시측의 도움으로 부천시 고강동에 8백50평 대지를 구입,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러나 시당국 모르게 비닐하우스막사를 짓고 이주부터 하려던 철거민들의 계획은 뒤늦게 동태를 파악한 부천시청의 강경대응으로 미수에 그치는 바람에 임시막사를 짓는데 든 6백30만원의 지원성금만 내버린 셈이 된 채 당분간 명동성당내 천막생활을 계속해야만 하게됐다.
집지을 돈이 없어 비닐하우스라도 지어 살아야겠다는 영세철거민의 딱한 사정과 법이 있는데 무허가건축을 눈감아 줄 수는 없다는 행정당국의 입장.
가난이 불법건축도 용인케하는 특권일수 없지만 미관을 위해 가난한 영세민의 생존권이 무시되어서도 안될 일이고 보면 상계동철거민의 새 보금자리 정착은 우리사회 민주복지행정의 시금석일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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