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송곳 질문 … 장황한 답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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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낮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고등학생들에게 때아닌 경제학 강의를 하느라 진땀을 뺐다. 고교 경제 경시대회 수상자들과 만난 점심 자리였다.

"교과서에서는 작은 정부가 효율적이라고 배웠는데 왜 공무원을 늘리고 세금을 더 걷어가느냐"는 질문에 한 부총리는 예상치 못 했던 듯 애써 자세하게 답변했다. 한 부총리는 "정부의 기능을 놓고 큰 정부, 작은 정부 식의 극단적인 논쟁을 하는 것보다 국민을 위한 최소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적절한 정부가 되는지를 따지는 게 중요하다"며 긴 답변을 마무리했다.

한 부총리의 말대로 현 정부가 '적절한 정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노무현 정부 들어 늘어난 공무원은 2만3000여 명. 대부분 사회복지 공무원과 경찰관.교사 등 서비스를 위한 필수 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절한 정부와 거리가 먼 내용도 많다. 노무현 정부 이후 늘어난 장.차관급 자리는 27개다. 7개의 대통령 직속위원회가 새로 생긴 것을 비롯, 정부 위원회만 17개나 늘었다. 381개 정부위원회 중 32개는 최근 2년 동안 회의 한 번 열지 않았다. 부처마다 기획단이나 TF팀이 잇따라 만들어졌지만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쏭달쏭한 조직도 부지기수다.

사실 이날 학생의 질문은 정부 혁신이 무엇보다도 공공개혁을 통한 군살빼기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딱 부러지게 답변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곧 현 정부가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동안 노사 현장에서 법보다 대화와 타협이 우선하고, 부동산 시장에서도 공급을 늘려 가격을 낮추는 원론적 접근보다 투기 억제라는 명분이 앞서는 등 원칙이 무시되는 일이 잦았다. 고등학생이 교과서에서 배운 원칙과 현실이 다르다고 느끼는 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홍병기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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