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맛봐야 내일이 알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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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학 입시의 까마득히 높은 문턱을 넘은 합격자들이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받으며 기쁨에 들떠 있는 한켠에서 눈물과 한숨을 쏟고 있는 낙방생들을 어떻게 위로·격려하면 좋을까. 사회의 모든 관심이 수석 합격자를 비롯한 「영광의 얼굴」들에게만 온통 쏠려 있는데 대해 안종관 교사(서울 숭문고)는 몹시 우려한다.
『해마다 약 50만 명에 이르는 낙방생들이 마치 「입시 훈련장의 쓰레기」인양 내팽개쳐져 싸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직시해야 합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12년 동안 대학엔 반드시 가야 하는 것으로 「세뇌」시켜 놓고는 이제 와서 「까짓 대학 시험에 좀 실패했기로서니 무슨 대수냐」고 위로할 수도 없고….』 서봉연 교수(서울대·심리학)는 『사실상 낙방생의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특별한 묘안은 없다』고 말한다.
합격자 발표가 난 뒤 최소한 2∼3일에서 1주일 가량은 낙방생 스스로 마음을 삭이도록 혼자 있게 한 다음 대학 입시에서의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는지를 부모와 함께 상의해 볼 수밖에 없다는 것.
덮어놓고 낙방생을 위로하려고만 드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우선 왜 대학엘 가려 했는지 그 이유부터 생각해 본 다음 만일 재수해야겠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학습의욕·습관·태도 및 각 과목별 성적 등 여러 측면에서 문제점과 그 해결 방법 등을 알아보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실패는 본인이 수용하기에 따라 영영 좌절해 버릴 수도 있고 보다 나은 장래를 위한 분발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적절한 책을 선물해 읽어보게 하거나 미더운 선배라든지 일가친척들과 대화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덧붙인다.
지난해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고민하는 딸에게 차 한잔과 찰떡을 갖다주며 「사랑하는 진아야, 대기만성 알고 있지?」라고 쓴 쪽지를 손에 꼭 쥐어 줌으로써 가장 힘든 첫 고비를 넘겼다는 주부 정성희씨(43·서울 은평구 역촌동)는 『처음엔 어찌나 속상하고 창피하든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딸의 상처난 마음을 생각하며 빨리 의연해지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한편 한국 YMCA 연맹은 오는 2월초 후기대 합격자가 발표 되는대로 낙방생들을 위한「새 출발 캠프」를 열 계획이어서 이채. 낙방생들이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고 자신의 입장을 돌이켜보며 새로운 각오로 앞날을 설계해 보도록 돕는 숙박 프로그램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합격자들을 위해서는 각 사회 기관 및 단체들이 「예비 대학」을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어 합격의 기쁨을 더욱 고조시켜 주었으나 정작 몸둘 곳이 마땅치 않고 마음을 추스르기도 어려워 방황하는 낙방생들을 위해서는 별다른 배려가 거의 없었던 실정.
서울 J고 박 교사는 『어이없게도 「대다수」인 낙방생들을 자신들만의 실수요, 책임인양 외면 해 온 터에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생긴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며 『앞으로 좀더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널리 확산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지난해만도 입시에 실패한 것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낙방 생이 50여명에 이른 사실을 지적하면서 『「대학에 못 가면 큰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학교 교육과 취업 및 임금 구조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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