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조 연기금 '덩칫값'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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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증시 수급의 버팀목으로 불리는 연기금이 제 몫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장기 투자보다는 시황에 따른 수익률 관리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운용 실적 평가를 대부분 1년 주기로 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하기가 어려운데다, 투자 대상이 다양하지 못해 장기 투자의 바탕이 되는 위험 관리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의 지나친 간섭이 오히려 안정적인 투자를 그르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연기금의 주식 보유 규모는 지난해 말 현재 11조6000억원이다.

◆연기금 순매도 증가=지난해 하반기부터 올 초까지 연기금은 주식을 꾸준히 사들였다. 그러나 종합주가지수가 900대 중반에 이르자 매물을 쏟아내기 시작해 월 평균 지수가 964였던 2월에는 4881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증시 활황기였던 1999년에도 지수가 900 중반이었던 7~8월과 11~12월에 연기금의 대규모 매도가 있었다.

특히 이달 들어서는 시장에 충격을 줄 정도로 매도 규모가 커졌다. 이달 초부터 19일까지 연기금은 삼성전자.SK텔레콤.국민은행.현대차 등을 중심으로 4994억어치를 팔았다. 지수가 급락한 11~19일 순매도 규모는 8291억원에 이른다. 같은 기간 외국인 순매도는 252억원이었다. 최근 연기금의 매도는 지수를 따라가는 '인덱스 펀드'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싼 선물을 사고 현물 주식을 팔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 펀드매니저는 "연기금은 지수가 900만 넘으면 차익을 챙기면서 보수적인 운용에 들어간다"며 "투자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연기금의 주식 투자가 늘어나더라도 수급 안정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가 시스템 고쳐야=국민연금 등 대부분의 연기금은 1년 단위로 수익률을 평가한다. 연기금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굴리는 운용사는 연간 수익률이 나쁘면 교체될 수도 있기 때문에 2~3년 이상을 내다보는 장기 투자를 하기가 어렵다. 연기금 투자풀 운영에 참여하는 운영사는 위험을 반영한 수익률이 업계 평균에 미달하면 자동 탈락한다. 열린우리당 박영선 의원은 "연기금에 대해 실시하고 있는 국회와 감사원의 감사가 1년 실적 위주여서 장기적인 안목의 투자가 불가능하다"며 "기금 운용의 권한을 기금운용위원회에 대폭 위임하고 연기금 운용자에 대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진완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장기적으로 국민연금의 운용 규모는 국내 시장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커질 것"이라며 "시장 충격을 줄이고 안정적인 운용을 하기 위해서 해외 주식과 채권에 대한 투자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170조원의 자산을 굴리는 미국의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캘퍼스)은 운용에 관한 모든 권한을 독립된 이사회에 위임하고, 투자 본부는 180여명의 각 부문별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캘퍼스는 국내외 주식.채권은 물론이고 파생상품 등에 분산 투자를 하며,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수년~수십년에 걸쳐 기업 가치를 높이기도 한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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