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최순실 비선 인정 거부한 이유···"비참해지기 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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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씨와 박근혜 전 대통령. [중앙포토]

최순실씨와 박근혜 전 대통령. [중앙포토]

'비선실세' 묻자 박근혜 "비참합니다"…의혹 덮으려 한 전말은

지난해 10월 '비선실세' 의혹이 불거졌을 때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최순실씨의 존재를 인정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까지 가고 싶지 않다"며 숨기려 했다는 법정 증언이 나왔다.

홍보·경제수석 "비선실세 인정해야 한다" 조언에도 #"崔 존재 인정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 가고 싶지 않다" # 태블릿PC 보도 전까지 '비선도 실세도 없다'로 정리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 이영훈) 심리로 열린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당시 상황에 대해 말했다. 대기업이 큰돈을 선뜻 냈다는 미르·K스포츠재단의 이름이 알려지고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보도가 나오던 때였다. 아직 최씨의 태블릿PC 보도는 나오지 않았던 시기다.

안 전 수석의 증언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12일 경제수석·민정수석·홍보수석으로 재직 중이던 안종범·우병우·김성우 세 사람을 만나 대응방안을 상의했다. 안 전 수석은 당시 면담을 "비선실세를 인정하고 나름대로 설명과 말씀을 하시도록 결심을 받아내기 위한 자리였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최씨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기자회견은 열리지 않았다.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말씀 자료 최종본에 '제 주변에는 비선이니 실세니 하는 사람 존재하지 않습니다'는 문장을 남기는 것으로 정리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안종범 전 수석. [중앙포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안종범 전 수석. [중앙포토]

안 전 수석은 "당시 박 대통령이 비참하다는 표현까지 쓰면서 대통령 말씀 자료에 최순실씨의 존재를 포함시키는 것을 거절했느냐"는 특검팀 검사의 질문에 "그 말은 저도 기억한다. '최순실의 존재를 인정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까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안 전 수석은 "대통령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설명은 하시되 비선실세 언급은 안 하시겠다고 한 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안 전 수석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 전 홍보수석이 먼저 '비선실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자 박 전 대통령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안 전 수석도 나서 강하게 건의하자 박 전 대통령이 "꼭 인정해야 하느냐"고 답했다.

특검팀이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우 전 수석의 태도를 묻자 안 전 수석은 "별말 없었다. 내 판단에는 소극적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우 전 수석이 재단에 대해 법률 검토를 한 결과 큰 문제 없다는 취지로 말했느냐"는 특검팀의 질문에 안 전 수석은 "그렇다"고 답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이 최씨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JTBC의 태블릿 PC 보도 이후였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4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씨로부터 도움받게 됐고 왕래하게 됐다"며 최씨의 이름을 처음 언급했다.

지난해 11월 4일 청와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뒤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해 11월 4일 청와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뒤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우 전 수석의 변호인은 박 전 대통령의 당시 담화문 일부를 읽은 뒤 안 전 수석에게 "홀로 사는 여성으로서 필요한 것을 심부름시킨 것이 인간적으로 비참하다고 표현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안 전 수석은 "(최씨의 존재를 인정하는 표현을) 10월 12일 당시에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영훈 재판장은 검찰과 변호인의 증인신문을 모두 듣고난 뒤 "이해가 안 된다"며 안 전 수석에게 재차 물었다. "박 전 대통령이 '비참하다'고 한 것이 억울하다고 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사실이지만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느냐" "최순실씨가 재단 인사 등에 관여했는데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다고 한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 등의 질문을 했다.

안 전 수석은 "대통령께서 최순실의 존재를 저희들 앞에서는 인정하셨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그걸 국민들에게 이야기하기는 힘들다고 하셨다"면서 "개입 자체는 인정하신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사익을 추구한 것이 없는데 국민들한테 공개를 하고 비선실세를 인정할 정도로 내가 비참할 정도는 아니지 않냐'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민정(수석실) 보고서를 보고 대통령께 '문제가 안 되니 과감하게 정면돌파로 가시는 게 좋다'고 말씀드렸다"는 것이 안 전 수석의 주장이다.

이 재판장은 "최씨 뿐 아니라 대통령과 청와대가 관련된 문제다.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가 (보고서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이 없다"면서 "고작 민정에서 작성한 한장짜리 검토 보고서 하나만 보고 법적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냐"고 물었다. 안 전 수석은 "정말 그렇게 믿었다. 개인적으로 횡령이 있으면 문제가 되지만 전반적으로 대통령이나 공직자에 직권남용 등 문제 될 소지가 없다고 들었기 때문에 (민정수석실 보고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6~7일 이틀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던 안 전 수석에 대한 증인신문은 "신장암 재발로 인해 7일에는 하루종일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안 전 수석 요구에 따라 이날 마쳤다. 안 전 수석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오후 4시 55분까지 이어진 증인신문을 모두 마친 뒤 "오늘 끝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법정을 나갔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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