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서 '한민족 뿌리' 캐는 당뇨 전문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당뇨병과 한민족의 기원.

연관이 없어보이는 두 분야를 동시에 연구하는데 20년을 바쳐온 사람이 있다. 당뇨병 전문의인 이홍규(62) 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 그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시베리아 바이칼호(湖) 인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한국바이칼포럼'의 공동 대표이기도 하다. 4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이 모임엔 사학.지질학.고고학.언어학.민속학 등 인문학 방면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과는 '노는 물'이 달라도 한참 다른 이 교수가 바이칼호나 민족의 뿌리에 관심을 갖게된 건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1986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린 '조직적합성 유전자(HLA) 학회'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서 한국 사람과 중국 북부 사람들이 당뇨병을 유발하는 공통적인 유전자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한민족의 북방기원설을 입증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어 귀가 솔깃해지더군요."

이 교수는 전문가들로부터 관련 자료를 입수하는 한편 국내 사학자들의 모임에 나가 자신의 연구 내용을 발표했다. 이 교수의 열성 때문인지 전공이나 연배에 관계없이 같은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2000년 이 교수는 시베리아를 찾아가 현지인들의 유전자를 직접 연구해 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2002년 여름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바이칼호로 떠났다. 평소 토론과 자료 수집차 어울렸던 수십명의 인문학자들과 함께였다.

"깜짝 놀랐습니다. 원주민인 브리야트족의 얼굴이 우리 민족과 똑같은 거예요. 문화도 어찌나 비슷한지 몰라요. 한국의 솟대.장승과 유사한 무속신앙도 갖고 있더군요. "

현지 답사 이후 '한국바이칼포럼'을 구성한 회원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모스크바대와 공동으로 한민족과 시베리아 원주민 간의 유전자 비교 연구에 몰두했다. 회원들의 연구 결과를 모아 2004년과 2005년 영문으로 된 두 권의 의학 서적을 펴냈다. 최근에는 '바이칼에서 찾는 우리 민족의 기원'(정신세계원)이라는 책자도 출간했다. 2002년 이후 회원들이 따로 또 같이 시베리아를 드나들며 연구한 결과를 집대성한 현장보고서인 셈이다.

"책 출간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비교언어학회를 출범시켜 우리 말과 주변국 언어들을 비교 연구해보려고 해요. 바이칼호 주변의 유적 발굴을 지원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습니다."

"의사가 쓸 데 없는 일을 하는게 아닌가"라는 지적도 나올 수 있겠다고 하자 그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함께 전공 분야인 당뇨병을 연구할 수 있다는게 자랑스럽고 보람도 있다"고 했다.

신예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