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협정 파기' 피하고 의회에 공 넘긴 트럼프의 이란 핵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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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3일 오후 12시50분(현지시간, 한국시간 14일 새벽 1시50분)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 이란과의 핵협정을 강화하기 위한 국내법 개정 방침을 발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3일 오후 12시50분(현지시간, 한국시간 14일 새벽 1시50분)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 이란과의 핵협정을 강화하기 위한 국내법 개정 방침을 발표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 합의'의 즉각 전면폐기라는 극한적 선택은 일단 피했다.
대신 이란의 핵 합의 준수 여부에 대한 재인증(recertify) 판단을 '불인증' 의견으로 의회에 넘겨 의회가 60일 내에 대 이란 제재를 재개할 지, 새로운 국내법 개정안을 만들지, 기존 협정을 유지할 지 여부를 결정해달라고 주문했다. 사실상 의회에 공을 떠넘긴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대 이란 신 정책'을 13일 오후 12시50분 (현지시간; 한국시간 14일 오전 1시50분) 직접 생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트럼프는 이날 회견에서 "이란은 (핵 개발에 있어) 북한과도 연계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과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2일(현지시간) 오후 전화 브리핑을 통해 "지난 2015년 7월 합의한 이란 핵 협정(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서 놓친 부분들을 메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JCPOA 이후 미 국내법으로 만든 '이란 핵 합의 검증법안(INARA)'에 추가로 (이란이) 테러단체 지원 등을 할 경우 즉시 제재를 (이란에) 발동하는 '트리거(trigger) 조항'을 강화한 'INARA 개정안'을 의회에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트리거 조항이란 국제사회에서 제재 대상국이 결의안과 어긋나는 특정 행동을 했을 경우 자동으로 추가 제재가 가하는 자동 개입 조항이다.
틸러슨 장관은 "트리거 조항에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탄도 미사일 개발에 관련된 내용도 들어가며 JCPOA 안에 있는 만기일 항목을 아예 없애 (양국의) 대통령이 바뀌어도 영구히 지속되도록 하는 내용 등도 포함될 것"이라며 "이 중 하나라도 어길 경우 즉각 제재에 들어간다"고 강조했다.
기존 이란 핵합의에 따르면 2020년에 이란의 무기수출 금지가 풀리고, 2031년에는 모든 핵 제약이 풀리게 돼 있다. 바꿔 말하면 2031년부터는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게 돼 있다. 이 일몰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이란이 영구히 핵 개발을 못하도록 막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2015년 7월 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독일 등이 참여한 가운데 이란이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 등 서방국가가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단계적으로 해제하는 내용의 JCPOA에 합의한 바 있다.

이란 핵협정 파기하는 대신 '불인증'→의회에 60일내 제재 재개 여부 맡기기로 #협정 일몰조항 없애고 미사일도 규제 대상에 포함하는 개정안 의회에서 추진할 듯 #개정안 자체가 사실상 합의 뒤흔드는 것으로 핵 협정 파기 수순으로 갈 수도

2015년 미국 등 서방국가와 이란 간에 합의됐던 내용들.

2015년 미국 등 서방국가와 이란 간에 합의됐던 내용들.

이후 당시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핵협정에 대한 초당적 지지를 얻기 위해 별도의 국내법 INARA를 제정, 이란의 합의 준수 여부를 90일마다 점검해 의회에 보고하고 이에 입각해 미 의회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 관련 제재를 풀어준 것을 계속 유지할 지 여부를 판단해 왔다. 트럼프 정권 들어서도 두차례 '인증'을 해 왔다.
트럼프는 이날 회견에서 일단 15일로 만기를 맞은 세번째 준수 합의 판단을 '불인증'으로 한 뒤 새로운 INARA 개정안 통과 혹은 제재 재개 등의 의회 결과가 나올 때까지 60일의 유예기간을 주기로 했다. 다만 의회가 제재 재개 쪽으로 나설 경우 이란 핵협정은 사실상 파기될 전망이나 협정 파기는 안 된다는 게 의회 다수 의견이라 그 가능성은 크지 않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유세기간 때부터 "오바마 행정부 시절 체결한 이란 핵합의는 최악의 합의였다"며 즉각 폐기할 뜻을 밝혀왔다. 지난 5일에도 "이란은 핵 합의 정신이 부응하지 않았다"고 규정한 뒤 "이란 정권은 테러를 지원하면서 중동 전역에 폭력과 혼란을 수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결정은 일각에서 예상했던 JCPOA의 전면 폐기는 피하면서 협정의 세부 내용을 대폭 강화한 국내법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공을 의회에 넘긴 것으로 해석된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왼족)과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왼족)과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틸러슨 장관은 이날 "이번에 개정하려고 하는 건 국내법인 만큼 의회에서 통과되고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을 하면 효력이 발생한다"며 이란 측과 별도의 협상을 할 뜻이 없음을 강조했다. 그는 또 "이번에 이런 조치를 취하려는 건 우리 파트너(협정 참여국)들에게 JCPOA에서 놓친 부분들이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며 "JCPOA를 (파기하고) 다시 (협상을) 시작하는 것은 이란이 반대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파기하지 않고 새로운 합의(INARA 개정안)를 나란히 병행해 나가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연설에서 미 재무부에 이란의 테러리스트를 돕는 개인 및 단체에 대한 제재 부과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의 행정명령도 발표할 계획이다.
하지만 미국 측이 아무리 국내법 개정이라고 주장해도 결국 기존 JCPOA 합의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는 만큼 이란의 격렬한 반발이 예상된다. 실제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난 7일 "이 세상에 트럼프가 10명이라고 해도 (기존) 핵 합의는 돌이킬 수 없다"고 경고한 바 있다. 또한 협정 타결에 관여했던 다른 국가들이 미국에 전면 동조할 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일각에선 "이란 핵협정이 파기될 경우 트럼프 행정부와 북한과의 대화 혹은 협상 가능성도 사실상 사라질 것"이란 분석이 많았던 만큼 이번 결정으로 일단 북·미 간 협상의 여지는 남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켈리 비서실장 “(대북) 외교가 통하길 기대”

백악관의 새로운 실력자로 불리는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은 12일(현지시간) 북핵 문제와 관련, “외교가 통하기를 기대하자”며 ‘외교적 해법’을 강조했다. 이날 오후 예고 없이 백악관 브리핑룸에 나타난 그는 “당장은 그(북핵) 위협이 관리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시간이 흘러 상황이 지금보다 커지면 (모르겠지만) 글쎄, 외교가 통하기를 기대하자”고 말했다. 또 “(내 발언은) 현 행정부를 대변하는 발언”이라며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미국 본토에 도달할 능력이 못된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북·미 간 긴장 완화와 함께 아직까지는 군사옵션을 활용하지 않고 외교적 수단만으로도 북핵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을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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