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 유출은 대통령님 정성 보여준 일" ...변호인 울린 정호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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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중앙포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 [중앙포토]

"제가 오랫동안 모셔온 대통령께서 재판을 받는 참담한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 고통을 도저히 감내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증언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10개월 만에 '법정 조우'한 정호성 # 朴 전 대통령에게 허리숙여 인사 #"참담하다"며 증언은 거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는 정호성(48)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18일 박 전 대통령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지만 검찰과 변호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정 전 비서관은 지난해 11월 구속기소된지 10개월 만에 박 전 대통령을 청와대가 아닌 법정에서 처음 만났다. 자신의 재판 심리를 모두 마치고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정 전 비서관은 푸른색 수의를 입고 들어와 박 전 대통령이 앉은 피고인석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재판부를 향해서는 따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부장 김세윤)는 증인석에 선 정 전 비서관에게 "증언을 거부하겠습니까, 선서하고 증언을 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정 전 비서관은 헛기침과 함께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면서 운을 뗀 뒤 증언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정 전 비서관은 이날 자신이 과거 검찰에서 조사받은 내용이 담긴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에 대해서만 "제가 이미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한다"고 말했고 이외의 질문에는 모두 "증언을 거부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날 오전과 오후 내내 예정돼 있던 정 전 비서관에 대한 증인신문은 그가 법정에 들어온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끝났다.

법정을 떠나기 전 정 전 비서관은 "재판과 관련해 그동안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 있다"며 발언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이 사건이 벌어지고 저한테도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가슴 아픈 것은 대통령님에 대해 너무나 왜곡되고 잘못 알려진 것들이 너무나 많다"면서 박 전 대통령 쪽을 바라보며 "대통령님께서는 가족도 없으시고 사심 없이 24시간 국정에만 올인하신 분이고 특별히 낙도 없으시다"고 말했다.

정 전 비서관은 이어 "문건 유출 사건 관련해서 저는 오히려 이 사건이 대통령님이 얼마나 정성들여 국정에 임하셨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님께서 지적하고 말씀하신 부분은 확인해 보면 거의 다 대통령님께서 옳으셨다"면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국민들에게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할 수 없는가 고민하셨고 그 과정에서 최순실씨 의견도 들어보면 어떻느냐는 취지의 말씀도 있으셨다"고 말했다. "최순실씨에게 문건을 전달해 주라는 구체적인 지시가 아니라 어떻게든 잘 해 보려는 국정 책임자의 노심초사였다"는 것이 그가 밝힌 청와대 기밀 문건의 유출 배경이다.

방청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박 전 대통령의 왼쪽에 앉은 유영하 변호사는 천장을 보며 숨을 고르더니 연신 휴지로 눈과 코 주변을 찍어냈다. 정 전 비서관은 "대통령님은 그걸(청와대 기밀 문건) 주라고 지시한 것도 아니고 어떤 문건을 (최씨에게) 줬는지도 모르신다"면서 "세계 어떤 정상들도 다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게 어떻게 죄를 물을 수 있는지…"라고 말끝을 흐렸다.

박 전 대통령은 안경을 꺼내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정 전 비서관의 말을 들었다. 이따금씩 방청석과 재판부 쪽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정 전 비서관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유 변호사는 정 전 비서관이 법정을 떠난 뒤에도 훌쩍이며 말을 잇기 어려워했고, 박 전 대통령은 그 옆에서 한 차례 휴지로 눈가를 닦아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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