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교수,
그를 만난 게 지난해 3월이었다.
고백건대 만나기 전에 그에 대해 잘 몰랐었다.
오래전 소설 『즐거운 사라』로 고충을 겪었다는 사실 정도만 알 뿐이었다.
처음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게 적잖이 놀랐다.
그날 내 앞의 마 교수는 선입관으로만 인지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인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메모해 두었다.
“윤동주가 화제긴 화제인가 보오. 나를 다 취재하러 오시고….”
당시 영화 ‘동주’의 관람객이 100만 명을 넘고 있었다.
그리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5만 부 넘게 팔리고 있었다.
가히 윤동주 신드롬이라 할 만한 상황이었다.
메모는 이렇게 이어져 있었다.
“다들 윤동주와 내가 안 어울린다고 하는데 나도 시인 아니오. 소설보다 시로 먼저
등단했잖아. 그 사람도 솔직했고 나도 솔직했지. 윤동주는 참 쉽게 썼소.
신통하게도 주석 없이도 누구나 알 수 있게 썼소. 난 윤동주의 그런 점에 끌렸소.
사람들이 이제야 시를 볼 줄 알게 된 거지. 문학이 결국 소통 아닌가!
나도 요즘 시 한 줄 읽으려면 세 번 읽어야 하니…. 이러니 시가 외면받는 거요.
쉽게 쓰기가 정말 어려운 거다.”
마 교수가 윤동주 시인 관련 논문으로 박사가 된 것을 이때야 알았다.
이 말을 할 때 그는 시인이자 학자였다.
그 다음 메모는 이랬다.
“마흔한 살에 잡혀 들어가 40대 10년을 잃어버렸어. 하지만 변절은 안 했어.
다른 글은 몰라도 적어도 소설과 시로는 성을 파고 들었지. 이건 너무 중요하잖아.
잡혀갔다 온 지 25년인데 여태 제2의 마광수가 안 나와.
솔직한 문학이 안 나오는 거지. 이게 한국 문학의 현실이지.”
소설가로서 그의 문학은 적어도 솔직했다는 것을 토로했다.
한국 문학의 현실을 한탄했다.
이때의 마 교수는 천생 소설가였다.
그 다음 메모는 삶 이야기로 이어져 있었다.
“8월이면 정년 퇴직인데 중간에 8년을 놀아 연금도 얼마 안 돼요.
외로운 독거노인이 되는 게지. 더구나 건강이 좋지 않다.
2년반 동안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고….”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줄곧 담배를 이었다.
담뱃불을 붙이고, 피우고, 또는 그냥 타게 내버려 두었다.
그 행위가 의식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렇게나마 한을 삭여야 하듯, 담배 향을 피워 올리는 듯했다.
인터뷰 장소는 그의 서재였다.
요모조모 둘러보다가 미닫이 문 유리를 통해 그를 보게 되었다.
가장자리가 각진 유리였다.
그것을 통해 보니 마 교수의 얼굴이 셋으로 보였다.
그날 마 교수의 인터뷰를 들으며 들었던 느낌이 이랬다.
지레 짐작으로만 알고 있던 마 교수가 아니라
내가 몰랐던 또 다른 마 교수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세 얼굴의 마 교수를 찍었다.
그가 황망히 떠났다.
그 바람에 오래도록 그의 사진과 메모를 보았다.
그의 떠남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그때마다 새로운 마 교수가 나타났다.
어줍잖은 나의 잣대로 헤아릴 수 없었던 또 다른 마광수였다.
부디 영면하십시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