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00억어치 영어원서 197만권 왜 인천 창고에 쌓여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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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인천시 서구 인천터미널 내 해법에듀 물류창고. 100억원어치 영어원서 197만 권이 쌓여 있다. [임명수 기자]

인천시 서구 인천터미널 내 해법에듀 물류창고. 100억원어치 영어원서 197만 권이 쌓여 있다. [임명수 기자]

인천시 서구 인천터미널 물류단지 안에 있는 ㈜해법에듀 물류창고. 최근 찾아간 4층짜리 창고의 3~4층에는 포장 비닐조차 뜯지 않은 박스들이 2m 높이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박스에 든 책은 유치원부터 대학, 일반 학원에서 쓰는 영어교육교재(ELT) 원서들이었다. 모두 197만 권. 14t 트럭 100대 분량이다. 책에 붙은 가격표대로라면 100억원어치지만 ‘이제 더 이상 판매할 수 없는 책’이라 폐지 가격으로 치면 고작 1억4000만원어치라고 한다.

해법에듀, 피어슨 책 국내 독점판매 #교보문고 재고물량 인수 조건 계약 #해법에듀 측 “대부분 팔 수 없는 책” #교보·피어슨 상대 50억 반환 소송 #교보는 “통상적 계약 절차 거쳤다”

해법에듀는 왜 이처럼 판매할 수 없는 책을 물류창고에 쌓아 놓았을까.

해법에듀는 2014년 10월 중순 이들 영어교재를 발행하는 글로벌 출판사인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와 독점권 계약을 맺었다. 영국이 본사인 피어슨에서 발행하는 영어원서를 한국에서 단독으로 판매하는 유통권을 따낸 것이다.

하지만 피어슨이 수년 전부터 교보문고에 판매했으나 남은 재고를 해법에듀가 인수하라는 조건이 붙었다고 한다. 금액만 200억원어치 상당이었다.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 측의 원서를 독점 판매하고 싶었던 해법에듀 측은 이런 조건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협의를 통해 200억원어치 중 140억원어치(256만 권)를 가져와 일부를 팔았지만 아직 197만 권이 남았다고 한다.

해법에듀 관계자는 “당시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 관계자가 ‘교보의 재고 물량은 피어슨 본사에서 판매한 것으로 3년6개월 정도면 모두 소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그 증거로 교보의 재고 목록과 판매 실적, 매출 규모 등을 담은 시뮬레이션까지 보여 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조건부 계약이기 때문에 교보의 재고 물량과 교재들을 확인하려 했지만 피어슨 측 관계자는 ‘우리가 해법과 계약을 맺은 사실이 알려지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소문내지 말라’며 재고 확인을 못하게 했다. 국내 출판 유통기업이 거대 글로벌 기업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해법에듀는 2014년 12월 31일 교보문고와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의 재고 물량’을 인수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문제는 교보문고로부터 재고 물량을 받은 뒤부터였다. 해법에듀 관계자는 “3년간 판매부수가 단 한 권도 없는 도서가 들어 있는가 하면 이미 절판됐거나 정식 출판조차 안 된 도서도 포함돼 있었고 발행일이 짧게는 7년에서 길게는 20년이 지난 책들도 있었다. 일부 교재는 1~4권 등 시리즈물임에도 중간 순서가 없는 것도 많아 사실상 판매가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해법에듀는 지난해 4월 ‘계약을 미끼로 악성 재고를 떠넘겼다’며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와 (주)교보문고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해법에듀의 재고 물량 140억원 중 1차로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와 교보문고에 지급한 50억원을 돌려달라는 지급금 반환청구소송이다. 해법에듀 관계자는 “민사소송과 별도로 피어슨에듀케이션 한국지사와 교보문고 측을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보문고 측 관계자는 해법에듀 측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해외 출판사의 독점계약은 독점적 지위의 소유권을 넘기는 것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반품 없음’을 내세워 계약한다”며 “피어슨 측에 우리의 판매 데이터나 매출 실적 등을 건넨 사실도 없다”고 해법에듀 측 주장을 강하게 부인했다.

피어슨 측 관계자도 기자와의 통화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린 적도, 보여 준 적도 없다. 해법에듀 측은 시뮬레이션 자료가 있다면 법원에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1년4개월째 진행되고 있는 법정 공방의 승자는 이르면 11월 중 가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인천=임명수 기자 lim.myoun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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