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에 읽는 『삼국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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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29면

삶과 믿음

후텁지근한 장마철에 잠은 안 오고,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서 『삼국지』 10권에 도전했다. 고전이란, 과거에 읽었는지와 관계없이 요즘 ‘다시’ 읽고 있다고 주위 사람에게 말하는 책이라던데(이탈로 칼비노의 말), 실제 주위에 물어보니 『삼국지』를 두세 번 이상 읽었다는 분이 제법 되었다. 그래서 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삼국지』를 선택하게 된 것은 최근 일간지에 실린 소설가 김훈 선생의 인터뷰 때문이다. 『삼국지』에 대한 악평이었는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은 대부분 군사깡패다. 의리를 명분으로 작당하고, 배신하고 합치고, 속고 속이고, 옆구리 찌르고 뒤통수친다. 그들은 전쟁과 살육이라는 그 비극적 현실 자체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싸움만 알았지 미래관이 없다. 『삼국지』가 동양 남자들의 정신에 미친 해악은 작지 않다”라는 글.

‘동양 남자들의 정신에 미친 해악’을 직접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10권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약 백 년(184년~280년) 동안 무수한 영웅들이 명분, 의리, 욕심으로 전쟁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해악을 찾아보겠다는 의도도 잊을 만큼 엄청 흥미진진했다. 나는 등장인물 가운데 특히 조조와 제갈량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렵게 세운 나라들도 몇 대를 못 가 망하고 만다. 씁쓸하게 무상함만 남기고.

김훈 선생과는 좀 다르지만, 내게도 책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이 있었다. 목을 잘라 죽였다는 이야기가 너무 쉽게 나온다는 점이다. 아무리 전쟁이야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꽃송이도 꺾으려면 몇 번을 망설이는데, 이들은 도대체 사람을 뭐로 본 걸까 싶을 만큼 어이없는 죽음이 많았다. 생명에 대한 소중함도 드러나지 않고, 사회나 국가의 목적을 성찰하는 대목도 찾아볼 수 없는 『삼국지』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참 재미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긴 대하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니, 장강(長江)에 어린 영웅호걸의 이름들이 잠시 스쳤다. 허망한 인생,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을까 싶기도 하고, 허망하기 때문에 그렇게 목숨을 걸 수 있었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인류사가 『삼국지』 같은 우여곡절의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잠깐 비개인 틈에 도반스님과 팔당댐으로 물 구경을 갔다. 9개의 수문을 열었는데, 마치 구룡이 물을 뿜어내듯 폭포를 이루었다. ‘장강의 푸른 물은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더니, 과연 혼탁한 황톳물은 중국의 장강처럼 분탕질 치며 서울을 향해 흘러갔다. 저것도 운명이려나~.

원영 스님
조계종에서 불교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아사리.
저서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것들』.BBS 라디오 ‘좋은 아침, 원영입니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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