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도 "역사 바로세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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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취임 3개월 만에 아르헨티나식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섰다. 아르헨티나 상원은 21일 1976~83년 군부독재 시절의 인권유린 행위를 처벌할 수 없도록 했던 두 개의 사면법 폐기안을 승인했다.

상원은 이날 지난주 하원에서 통과된 사면법 폐기안을 찬성 43, 반대 7, 기권 1의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폐기된 법은 86, 87년 제정됐던 '국민화합법'과 '의무복무법'이다.

◆신임 대통령의 군부 개혁=키르치네르는 5월 취임 연설에서 "억압적 군사정권에서 부패와 인권유린을 자행했던 군부를 혁신하겠다"고 밝혔다. 직후 그는 육.해군 장성의 절반 이상인 52명을 전격 해임하며 대대적인 군부 숙정에 나섰다.

이번 사면법 폐기도 그의 주도 아래 집권 페론당 내 진보파들이 주축이 됐다.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상원의원은 표결에서 "이제 국가의 미래를 세워야 할 때가 왔다"고 강조했다.

뉴욕 타임스는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국민은 인권유린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고 전했다. 이번 의회의 결정으로 군부독재 시절 민간인 납치와 살해.고문 등에 관여한 전.현직 군부 인사 1천여명이 수사.처벌.재판의 대상이 된다고 신문은 밝혔다. 군부독재 시절 자행된 이른바 '더러운 전쟁'으로 당시 최대 3만명의 민간인이 실종.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이 변수=그러나 본격적인 과거 단죄가 재개되려면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남아 있다. 대법원에서 의회 결정이 위헌이라고 판단하면 사면법은 그대로 유지된다.

일부 법률학자는 "사면 또는 기소불가 대상이라고 결정해 시행했다가 이를 번복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한다고 타임스는 보도했다. 다니엘 시올리 부통령, 리카르도 부시 의원 등 행정.입법부 내 보수파도 "사면법 폐기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비생산적 발상"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군부독재와 사면법=아르헨티나 군부독재는 82년 영국과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전하며 붕괴됐다. 83년 당선된 라울 알폰신 대통령은 전 정권의 인권유린 행위를 대대적으로 수사,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 군정 대통령 세 명과 장성.경찰 간부 등 3백70여명의 군정 인사들을 내란.인권유린 등의 혐의로 수감했다.

그러나 군부의 반발이 거세지며 쿠데타 기도가 잇따르자 알폰신 정부는 문제의 사면법을 제정했고, 추가 수사는 흐지부지됐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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