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 영구미제로 남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98년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 범인으로 기소된 스리랑카인. [연합뉴스]

1998년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 범인으로 기소된 스리랑카인. [연합뉴스]

19년 전 대구에서 발생한 여대생 정은희(당시 18세ㆍ대학 1년)씨 성폭행 사망사건이 사실상 영구미제로 남게 됐다.

피해자는 있고 가해자는 없고… #13년 만에 DNA로 범인 찾았지만 공소시효ㆍ증거능력 문턱 못 넘어 #무죄 확정된 스리랑카인, 별다른 처벌 없이 곧 본국 강제 추방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특수강도강간등) 등 혐의로 기소된 K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앞서 1, 2심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로 판단했고, 대법원도 같은 판단을 했다.

이 사건에 최종 무죄가 선고되면서, 사건은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모순적 결과를 맞게 됐다.

이 사건은 사고 현장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서 정씨의 속옷이 발견되는 등 특이점을 보였지만 발생 초기 경찰이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해 초동수사가 미흡하고 수사 태도가 소극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이른바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998년 10월17일 새벽 학교 축제를 끝내고 귀가하던 여대생 정씨가 구마고속도로에서 덤프트럭에 치인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불거졌다.

경찰은 교통사고에 초점을 맞춰 수사하다가 두 달여 뒤인 그해 12월 말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했다.

유족의 끈질긴 재수사 요청에 경찰은 K씨 DNA가 정씨의 속옷에서 나온 DNA와 일치하는 것을 밝혀냈다. 15년간 베일에 싸였던 범인 윤곽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다가 2013년 스리랑카인 K씨가 청소년에게 성매매를 권유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묻힐 뻔한 이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뒤늦게 범행 증거를 일부 확보한 것은 2010년 시행한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DNA법)에 따라 K씨 DNA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검찰은 2013년 9월 특수강도강간죄 등을 적용해 K씨를 법정에 세웠다. 이미 2001년과 2005년 각각 스리랑카로 돌아간 공범 2명도 기소 중지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공소시효 15년인 특수강도강간 혐의와 관련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특수강도강간은 강도를 하는 상황에서 강간 범행을 저지른 경우 등에 성립하는 데, K씨 일행의 강도짓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특수강도강간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국내 거주 스리랑카인 노동자들을 전수조사했다.

검찰은 노동자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공소장을 변경해 정씨 사망 직전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변경된 공소장은 정씨가 1998년 10월 17일 새벽 K씨 등 스리랑카인 세 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달아나다 고속도로에서 덤프트럭에 치여 숨진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도 “증언에 신빙성이 없고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증거가 부족하다”며 K씨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판결했다.

대법원도 2년여 심리 끝에 1, 2심과 다르지 않은 판단을 했다. 정씨 사망사건은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 외국인 근로자 3명에게 집단 성폭행당한 뒤 고속도로에서 죽음을 맞이한 불행한 일이었다는 부분은 밝혀졌다.

하지만 19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탓에 성폭행범을 잡았지만, 단죄하지 못하고 실체적 진실은 상당 부분 미제로 남기게 됐다.

K씨는 2013년 다른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와 2008∼2009년 무면허 운전을 한 별도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됐다. 집행유예가 확정된 외국인은 국내에서 추방된다.

K씨의 공범 2명은 각각 2001년과 2005년에 이미 고국으로 돌아간 상태다.

검찰은 법무부를 통해 사법공조 절차를 밟아 K씨를 스리랑카 현지 법정에 세우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조가 이뤄지면, 한국 검찰이 각종 증거자료를 스리랑카에 넘기면 현지 수사기관이 이를 검토해 기소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다만 스리랑카는 국제 형사사법 공조 조약에 가입돼 있지 않아 상당한 법적ㆍ외교적 노력이 필요할 전망이다. 또 같은 죄로 두 번 기소되지 않는 ‘이중처벌금지’ 원칙을 어떻게 법리적으로 해결할지도 관건이다.

스리랑카의 강간죄 공소시효는 20년으로 한국보다 훨씬 길며 형량도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 사건’ 주요 일지

1998.10.17 = 오전 5시 10분께 대구 달서구 구마고속도로(현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정양이 23t 트럭에 치여 사망. 당시 18세. 오후 1시 사고현장 인근서 정양의 속옷 발견
1998.12.21 = 경찰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 종결. 트럭운전사 최모씨 혐의없음 처분
1999.3 = 경찰 국과수에 속옷 감정 의뢰. 속옷에서 정액 검출했지만 DNA는 발견하지 못해 신원 확인은 실패
2000.9 = 유족들 담당 경찰관 등을 직무유기로 고소. 각하 처분
2001 = 유족들 불기소 처분에 헌법소원 제기. 기각 결정
2007 = 유족들 강간살인 혐의로 트럭운전사 고소. 혐의없음 처분
2010 = DNA 신원 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일명 DNA법) 시행
2011.10 = DNA법에 따라 청소년에게 성매매 권유 혐의로 붙잡힌 스리랑카인 K씨에게서 DNA 채취
2013.4.3 = 유족들 대통령 비서실에 탄원서 제출
2013.5.31 = 유족들 대구지검에 고소장 제출. 성폭행 살인범은 성명불상
2013.6.5 = 국과수 정양 속옷에서 발견된 정액과 K씨의 DNA가 일치한다는 사실 확인. 검찰 재수사 착수
2013.8 = 대구지검 K씨 체포
2013.9 = 대구지검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K씨 구속기소. 2001년과 2005년에 각각 고국으로 돌아간 공범 2명은 기소 중지
2014.5 = 대구지법, K씨 무죄 선고. 증거 불충분 이유
2014.6 = 검찰 항소 제기ㆍ국내 스리랑카인 전수 조사
2015.3 = 스리랑카인 ‘핵심 증인’ 사건 내용 증언
2015.5 = 대구지검,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 핵심 증인 진술 반영
2015.8.11 = 대구고법 무죄 선고. 증인 진술 신뢰성 없다고 결론
2017.7.18 = 대법원, K씨 무죄 확정

한영혜 기자 han.younghy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