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일 시킬까’ 아닌 ‘어떻게 쉬게 할까’ 골몰하는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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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일본 주식회사’에 ‘잘 놀게, 잘 쉬게 만들기’ 바람이 불고 있다. 기업들이 ‘어떻게 해야 직원들이 더 열심히 일하느냐’가 아니라, 직원들을 어떻게 더 잘 놀게 하고 잘 쉬게 할지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일본 사회의 대세라는 소위 ‘일하는 방식 바꾸기’ 열풍이다. 원인은 지독한 구인난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 속에 아베노믹스가 가져온 경기회복이 맞물려 유례를 찾기 힘든 일손 부족현상을 빚어냈기 때문이다. 기업 현장에선 ‘전 직원 동시 휴가’ ‘휴일 의무 지정제’ 등의 아이디어가 백출하고 있다.

고령화 속 경기 회복으로 구인난 #기업들 일하는 방식 바꿔 인재 유치 #시간외 근로 줄이기, 휴일 확보 총력 #격무 시달리는 신문사도 업무 개선

일본 최대 건축업체인 스미토모(住友)임업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30%인 휴가 소진율을 50%로 올리겠다”는 목표하에 2, 4, 6, 12월에 각각 나흘씩 전국의 지점과 영업소 80곳을 일제히 쉬도록 할 방침이다. 이사 업체인 아트코퍼레이션도 8월부터 전 직원이 업무를 쉬는 정휴일을 매년 30일 정도 지정할 예정이다. 편의점 세븐일레븐 등 소매업 브랜드를 운영하는 세븐앤아이홀딩스는 주요 계열 8개사 2만5000명을 대상으로 일제히 휴가를 사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일본 유력지인 아사히신문은 9일자에서 “격무의 상징이던 신문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전했다.

취재를 위해 밤이든 새벽이든 취재원의 집을 방문한다는 뜻의 일본어 ‘요우치아사가케(夜討ち朝駆け)’를 비롯, 아사히 기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혹사당했는가를 소개한 ‘과로 고백 보고서’ 같은 기사였다.

‘밤 12시가 넘어 취재원 집에서 취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가 새벽 5시반에 또다른 취재원의 집으로 향하는’ 경제부 기자의 하루가 소개됐다. “보람 있는 일이라 그동안은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했지만 이제 생각을 바꿔야겠다. 선택과 집중을 할 필요가 있다”는 기자의 고백까지 실렸다. 아사히는 업무 종료부터 업무 시작까지 11시간 이상의 휴식을 보장하는 등 일본 언론사들의 변신 노력을 기사에 상세히 담았다. 일본 언론의 서울 특파원은 “20년 전 만해도 일본 신문사의 분위기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바빠서 장례식에 못 갔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로 빡빡했다”며 “더 쉬려고 아이디어를 짜낸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근로시간이 아닌 성과에 따라 임금을 받는 ‘탈시간급’제도와, 근로자가 매년 104일 이상의 휴일을 반드시 확보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노동법 개정안도 마련 중이다. 또 매월 마지막 금요일엔 오후 3시 조기 퇴근을 권장하는 ‘프리미엄 프라이데이’제도는 지난 2월부터 이미 시행되고 있다.

과거 ‘죽기살기로 일하기’가 특기였던 일본 사회에 ‘일하는 방식 바꾸기’ 열풍이 불어닥친 데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정치적으론 아베 신조 총리가 국가 차원에서 드라이브를 걸었다. 지난해 9월 ‘일하는 방식 개혁 실현회의’를 꾸려 정권 차원의 프로젝트로 만들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 개선, ‘과로사 제로’와 ‘육아와 일 병행’ 실현을 위한 시간외 근로시간 상한 설정 등이 모두 테이블 위에 올랐다. 지난 3월 경영자 대표와 노조 대표를 관저로 불러 시간외 근로시간 상한을 ‘바쁜 성수기 때도 월 100시간 미만’으로 담판을 지은 것도 아베였다. 자민당은 올가을 임시국회에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법제화할 계획이다. 아베가 왜 이 문제에 몰두하는가를 놓고는 “성장위주의 아베노믹스 탓에 양극화는 더 심각해졌다” “총리가 개헌에만 매달린다”는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

기업들도 “과거와 같은 근무 조건을 고집해선 인재를 유치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여성 인재 확보도, 일자리 나누기도 가능하다는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됐다는 것이다.

서승욱·이기준 기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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