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독일서도 해결 안 된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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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독일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데모로 최루탄과 화염병, 물대포가 난무했다. 독일 최대 부수의 일간지인 ‘쥐트도이체 차이퉁’과 시사 잡지 ‘슈피겔’의 온라인 뉴스엔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Welcome to hell)”는 피켓을 들고 경찰과 격렬하게 싸우는 시위대의 모습이 매일 헤드라인으로 올랐다.

트럼프 다음으로 관심 끈 문 대통령 #위기를 모면한 게 아니라 유예한 것

문재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다음으로 독일인의 관심을 끌었다. 언론들은 “문 대통령, 북한의 붕괴를 원치 않는다”는 신베를린 선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의 방미 때 미국 언론이 대부분 무관심하거나 대북 대화 주장을 외면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화려한 조명을 뒤로한 채 오늘 아침 귀국한 문 대통령에겐 시간 계산서가 기다리고 있다. 미국 의회에 약속했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배치의 약속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한테 제시한 사드 취소의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킬 시간이 노루 꼬리만큼도 안 남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워싱턴의 의회 지도자들에게 “사드를 번복할 의사를 갖고 환경영향평가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버리시라. 배치 절차가 늦어지리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6월 29일)고 약속했다.

베를린에선 시진핑 주석에게 “사드는 북핵, 미사일 도발로 인한 것이다. 환경영향평가로 시간을 확보하고 그 기간에 해법을 찾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다른 말을 했다(7월 6일). 문 대통령은 환경영향평가에 대해 미 의원들한테는 “민주적·절차적 정당성이 꼭 필요하다”고 하고선 시 주석에겐 “북핵 해법을 찾기 위한 시간을 벌기용”이라고 설명했다. 미국한텐 환경영향평가가 늦어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으나 시진핑한텐 북핵 해법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리면 질질 끌 수도 있다고 암시한 것이다. 미국 입장에선 진정성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또 시 주석에게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사드는 저절로 취소된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미국 독립기념일 전야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날려 미국과 맞짱을 뜨겠다는 북한의 김정은이다. 그런 김정은이 한국의 대화 요청을 받아들여 핵활동을 중지하리라고 믿을 중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 대통령의 면전에서 “북한은 중국의 혈맹”이라고 말했다. 전례없던 일이다. 북한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두둔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이런 판에 “북핵이 해결되면”이라는 가정은 중국 입장에서 보면 불가능한 조건일 뿐이다.

미국한테 진정성을 의심받고 중국에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문 대통령이 얻은 것은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즉 진실의 순간을 유예한 것뿐이다. 문 대통령의 참모 그룹은 잠시 위기의 순간을 모면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참으로 환경영향평가 전에 북핵을 동결시킬 수 있다는 희망적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바보가 아니다. 문 대통령의 모호한 발언은 신뢰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자칫 미국과 중국 모두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는 위험한 수다.

선의와 설득으로 북핵을 동결시킬 수 있다는 희망적 믿음은 정신의 열정으로선 높이 사줄 만하나 실적과 결과로 증명받는 정치의 세계에선 취할 바가 아니다.

사드 배치는 미·중의 패권과 전략적 이익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안이 됐다. 대통령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럴수록 원칙으로 대응하는 게 정도다. 문 대통령이 시진핑에게 “사드는 한국의 주권적 사안이다. 주권적 결정에 제3국이 부당하게 간섭하지 마라”고 말하지 않은 게 아쉽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