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유엔총장 놓고 두 강국 신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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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차기 유엔 사무총장의 아시아 출신 인사 배정 문제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사무총장직의 지역순번제 원칙'을 놓고서다. 차례에 따라 다음 총장이 아시아에서 나와야 한다는 게 중국의 입장이지만 미국은 지역과는 상관없이 자질로만 뽑자고 맞서고 있다.

이와 관련, 뉴욕 타임스는 12일 미 행정부가 지역순번제를 무시하고 동유럽 후보 쪽에 마음을 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존 볼튼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아시아에선 이미 총장이 나왔다"며 "동유럽에선 언제 총장이 나오느냐"고 말했다. 아시아에선 1962년부터 10년간 재직한 미얀마의 우탄트 사무총장을 배출한 바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사실상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들이 결정한다. 그러나 현재 이들 나라 사이에서 지역순번제 준수 여부를 놓고 의견이 팽팽히 갈리고 있다. 영국은 자질로만 뽑아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프랑스는 지역 배분이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어정쩡한 태도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반드시 아시아에서 총장이 나와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특히 중국의 왕광야(王光亞) 주유엔 대사는 "중국은 아시아 출신 후보만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지역 후보에 대해선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미다. 자연히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지역 순번제 원칙의 준수 여부를 놓고 미국과 중국 간의 본격적인 격돌이 예상된다.

현재 아시아에선 수라키앗 사티라타이 태국 부총리와 스리랑카 출신의 자얀타 다나팔라 전 유엔 군축담당 사무차장이 공식적으로 출마 의사를 밝혔으며 이외에도 2~3명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동유럽에도 후보자들이 많다. 현재 라트비아의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대통령과 터키 재무장관을 지낸 케말 데르비슈 유엔개발계획(UNDP) 사무총장, 보스니아 평화유지활동을 벌였던 제이드 알후세인 요르단 왕자, 캐나다 출신 전범재판 전문가 루이스 아버 등이 거론되고 있다. 미국은 그중 비케프레이베르가 대통령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뉴욕 타임스는 역대 사무총장의 선출 과정을 보면 늘 공개적으로 거론되지 않던 후보가 사무총장으로 뽑혔다고 지적했다. 스웨덴 외교장관을 지낸 다그 함마르셸드는 53년 4월 1일 자신이 유엔 총장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만우절 농담이라 여겼을 정도다. 코피 아난 현 총장도 선임 2주 전에야 자신이 총장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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