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민우의 블랙코드

대통령의 진행 본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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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정치부 차장

최민우정치부 차장

문재인 대통령의 파격 행보가 화제다. 취임 첫날 야당을 직접 찾아가고, 임종석·조국 등 청와대 참모진을 50대 초반으로 꾸리며, 누구와 점심을 할 예정이라는 등의 세세한 일정을 공개하는 것 등등.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총리 후보자 등을 소개하는 순간이었다. 문 대통령은 10일 청와대 춘추관을 찾아 직접 마이크 앞에 섰다. 이낙연·서훈·임종석 등의 이름을 한 명씩 말하더니 “대탕평” “탈권위” 등의 그럴듯한 이유까지 부연했다. 그러고는 본인은 뒤로 빠졌다. 행사에 비유하자면 전형적인 MC의 역할이었다.

대통령의 이런 모습, 낯설기만 하다. 과거 청와대 인사 발표는 대부분 대변인 몫이었다. 쪽지를 들고 와 ‘나는 모르는데 이렇게 결정됐대’라는 투로 ‘죽은’ 활자를 읽기 바빴다. 정작 인물을 택한 리더의 고민과 속내는 좀체 느껴지지 못했다. 하물며 직접 나서서 진행이라니. ‘그런 건 아랫것들이 해야지, 어딜 어르신이…’라는 생각이었을 게다.

청와대뿐인가. 우리네 일상에서도 오너나 대표가 무대 전면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그저 어여쁜 여사원이나 말끔한 훈남이 ‘얼굴마담’처럼 사회를 맡고, 진짜 ‘주인’은 상석에 앉아 폼을 잡다가 축사 한마디면 족하다. 전형적인 ‘배후 실세’의 그림자다.

외국은 다르다. 아카데미상만 봐도 그렇다. 올해 진행을 맡은 코미디언 지미 키멀은 작품을 소개하거나 다음 순서가 뭔지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꼬는 등 거침없는 입담과 퍼포먼스로 시상식을 주도해 갔다. MC로 누구보다 명성을 얻은 이는 TED의 총괄 큐레이터 크리스 앤더슨이다. TED의 기획을 넘어 본인이 직접 진행을 하고 발표자와 대화를 하면서 ‘18분의 마력’을 세계적 이벤트로 만들었다. 진행이란 그저 나대거나 하찮은 게 아니라 ‘책임’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과거 정부에서 인사가 날 때마다 혀를 찼던 건, 그 인물의 깜냥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그를 택했는지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아서였다. 세상에 허물없는 이가 몇이랴. 하지만 발탁할 때도 내칠 때도 대통령은 침묵했다. 숱한 의혹 제기와 난도질에 내정자는 속절없이 쓰러졌지만 청와대는 ‘모르쇠’로만 일관했다.

권한이 아무리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대통령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리더요, 책임자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국정을 설명할 의무가 있으며, 국민은 듣고 볼 권리가 있다. 앞으로도 ‘문재인쇼’가 계속돼 기왕이면 정규 편성되길 기대한다. 너무 정색하지 않고 가끔 유머를 곁들인다면 시청률도 짭짤할 듯싶다.

최민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