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30. 빵점짜리 남편 노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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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50년대 말, 교통사고로 오른팔이 부러진 필자가 이교숙선생의 수업을 들으며 왼손으로 오선지에 쓴 강의 노트.

여자는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정말 고생했다. 그러나 생으로 뼈를 부러뜨린 오른팔의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낫는 게 인생이었다. 뼈가 붙는 것보단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1962년 나는 미 8군에서 국내 최초의 4인조 그룹인 '클럽 데이트'를 만들었다. 그 이후 4~6명 정도로 이뤄진 소규모 패키지 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그룹 '블루 리본(Blue Ribbon)'도 생겼다. 나와 같은 연예주식회사인 '화양' 소속이었다. 그 중 여자 드러머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같은 회사 소속이다 보니 자주 마주쳤다. 음악 이야기를 나누며 저절로 친해졌다. 몇 번의 여난(女難)으로 여자 보는 눈이 엄청나게 까다로워진 나였다. 그런 내 눈에 들었으니 그녀의 장점에 대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평생 함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미 8군 최초의 여성 드러머 명정강(63). 지금의 내 아내다. 그러나 나 같은 놈에게 누가 딸을 주겠나. 고아에 딴따라 아닌가. 월급은 꽤 받았지만 죄다 악기와 장비 따위를 사는 데만 쏟아붓느라 모아놓은 돈도 없었다. 그냥 데려다 사는 수밖에 없었다. 신촌에 월세방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록 음악을 하는 두 사람이 만났으니, 가정 분위기는 처음부터 여느 집과는 달랐다. 나는 매일 자정에야 귀가했다. 그러나 그런 내 생활을 이미 알고 결혼한 아내인지라 군말이 없었다. 이 같은 아내가 내겐 더없이 완벽한 짝이었다.

난 숫사자 같은 남편이었다. 영역을 침범하는 놈이 있으면 물어뜯고 싸우긴 해도, 새끼 양육은 철저히 암컷에게 모두 맡겨두는…. 사실 남편으로서 나의 점수는 빵점이었다. 같이 살기 시작한 해가 언제였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1964년인가, 65년인가…. 정신없이 음악만 하느라 처가와 왕래도 거의 없었다. 처가에서 누가 와도 '오나보다', 가면 '가나보다'하는 식이었다. 당시 나는 사람하고 사는 게 아니라 음악하고 살았다.

66년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다. 난 일반 무대와 미 8군 무대를 오가며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무대에서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의형제처럼 지내던 한 형님이 공연 도중 갑자기 무대에 올라와 욕설을 퍼부었다. 영문조차 몰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야, 네가 사람 ××냐? 네 처는 애를 낳아 병원에 있는데, 넌 그것도 모르고 음악만 하고 있구나. 어떻게 애비란 작자가 한 번도 병원에 안 들리나!"

워낙 스케줄이 바쁘고 공연이 늦게 끝나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문병 등을 잘 안 가는 성격이었다. 산부인과라는 곳에는 아예 갈 생각조차 못 해봤는데, 그 형이 나 대신 아내를 도와 준 모양이었다. 실제 나는 아들 셋을 낳으면서 한 번도 병원에 따라 가본 적이 없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집에 들어와 보면 못 보던 아기가 하나씩 누워 있는 식이었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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