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육군출신 국방 맡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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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명단을 작성, 총리를 청와대로 불러 올려 넘겨주는 식의 개각을 해왔던 박정희대통령의 스타일과는 다르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문민출신인 「대통령-국무총리」의 권위를 강조하는 말로도 해석됐다.
박동진외무·김원기재무장관을 제외한 각료전원이 교체된 12·14개각은 민심쇄신과 경제난국 타개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고 했다.
『각계의 중립적 인사를 발굴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채문식 신민당정무위원)는 야당쪽의 평소와는 다른 호의적 논평이 나온 이 개각은 이한빈 부총리·김옥길 문교·백상기 법무·이규호 통일원장관등 신인이 7명이나 기용되고 그동안 공화당·유정회에 할애해왔던 제1·제2 무임소장관 임명을 보류해 「정치적 오염」을 막으려 했다는 점등을 보면 그럴듯 싶었다.
또 경제난국을 타개하려는 실무내각·사무내각이라고도 풀이됐었으며 최대통령이 외교·안보분야와 정치분야를 맡고 신총리가 경제와 일반서정을 총괄하는 분담체제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그러나 일반의 관심은 「몇안되는」 (4명) 군출신인사의 각료기용에 있었다.
경찰을 지휘할 내무장관에는 김종환 합참의장이, 국방장관에는 주영복 전공군참모총장이, 총무처장관에 김용휴 국방차관이 임명된것이다.
73년 민정이양후 비육군출신이 국방장관에 기용된것은 김성은씨 (해병대사령관) 이래 처음이며 해방 후 공군참모총장출신으로서는 김정렬 현국무총리 이래 처음이었다.
또 김용휴 국방차관의 총무처장관임명을 두고 12월12일 밤의 김장관 역할에 관해 이론이 분분하기도 했다.
당시 최대통령 측근 인물로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한 인사는 『신총리의 제청을 최대통령이 가급적 수용했다』며 「외부」 입김이 별로 없었음을 강조하면서 『사실 그당시 상황에서 내각의 존재가 무슨 큰 의미가 있었겠느냐』 고 반문했다.
아무튼 신총리는 개각명단이 발표된 후 『새 내각은 거국내각인 동시에 일하는 능력을 갖춘 내각』이라며 『정치·경제·안보면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처하여 국민의 기대에 보답하는 방향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것』이라고 했다.
신총리는 또 12·12사태가 새정부의 정치스케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며 그 사건은 이미 다 진정됐다고 말하고 12·12로 조각이 늦어진것은 아니라고 굳이 설명했다.
세인의 관심을 끈 15일의 국방장관 이·취임식에서 전임 노재현장관은 신임장관을 중심으로 일치단결, 새로운 국군통수권자인 최대통령을 받들어 알찬 군의 발전에 헌신해달라고 했고 신임 주장관은 『정연한 위계질서밑에 굳게 단결,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갖추어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자』는 말로써 12·12의 후유증을 씻기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어떤 큰 물결이 만들어지고 있는것은 분명했지만 그 어떤것도 뚜렷하지 않은, 그래서 그 겨울의 정치는 더 짙은 안개속을 가고 있었다.
이제 그봄의 야당가로 얘기를 되돌리자. 80년4월 김영삼 신민당총재와 김대중씨가 호텔신라에서 두번째 회담을 했다.
이 회담을 끝내고 돌아온 김영삼총재는 김대중씨는 4월7일의 신민당중앙상위가 끝나면 입당할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씨도 『김총재는 7일 열릴 신민당 중앙상위 이전에 나를 입당하라고 했지만 중앙상위 후 재야사람들과 의논한뒤 입당할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두사람은 당을 함께 이끌어 간다는데 합의한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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