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유리할 때가 가장 위태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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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4강전 1국> ●커   제 9단 ○이세돌 9단

11보(119~131)=바둑에서 가장 위태로울 때가 언제일까. 예전 조훈현 9단에게 물은 적 있다. 조 9단 대답은 의외였다. 바로 "내가 유리할 때"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은 "유리하면 방심해 실수하기 쉽고, 한두 번 물러서다 보면 형세가 역전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형세가 좋을 때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낙관은 방심을 낳고 방심은 완착을 낳는다.

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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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120으로 붙이자 흑121로 젖히고 123으로 내렸다. 흑123이 놓이자 이세돌 9단의 눈빛이 순간 번뜩거린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빛이다. 이 수는 흑에 기울었던 반면에 변화의 빌미를 가져왔다(131…120). 백이 A에 먹여치는 순간, 좌변 흑마는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패'에 넘겨주게 된다. '패'는 나비효과처럼 수많은 변수를 만들어 종국에 형세까지 뒤집는 위력을 지닌 장치다.

참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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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제 9단의 고민이 깊어진다. '패'를 만들지 않으려면 '참고도' 흑6으로 호구쳐서 받아야 하는데, 이 진행은 백7, 11로 흑집이 푹 파여서 손실이 크다(2…13). 위풍당당했던 상변 흑집이 순식간에 초라하게 쪼그라든다. 커제 9단은 입맛이 쓰다. 거의 다 된 바둑이라 생각했는데, 순간의 방심으로 골치 아프게 됐다. 뒤로 느슨하게 풀어지는 듯했던 커제 9단이 다시 상체를 바둑판 쪽으로 일으켜 세운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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