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청사진부터 제시하라|장두성 <편집부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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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직 본격적 유세가 채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공약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더 이상 공약이 나오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보도된 약속만 그대로 지켜진다면 상당수의 국민들이 복지 혜택을 받고 많은 지역들이 숙원사업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모처럼의 선거철을 맞아 번영의 환상이 크게 인플레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유권자들은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을 그리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투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요인으로 유권자들이 공약을 꼽은 수는 전체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공약은 당선자가 확정되면서 식언이 되어버린다는 불신이 널리 퍼져 있다는 방증이다.
이와 같은 공약 불신의 책임은 1차적으론 정치인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런 불행한 전통을 바꿀 힘은 유권자들에게 있다. 이번 선거는 바로 그 힘을 발휘해야할 절박한 계기가 되고 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으뜸가는 공약은 우리 정치의 문민화·민주화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선거에 나선 네 후보들은 다같이 이 두 가지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민주화를 지금까지 정치 생애의 거의 유일한 추진력으로 살아온 두 김씨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 우리 국민의 민주화 역량에 유보적 입장을 취했던 나머지 김씨와 노씨도 이번에는 자신들이야말로 문민화·민주화의 적격자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으뜸가는 쟁점이 엄청난 규모의 다른 공약들에 가려 원래의 절박성이 흐려지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자아내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특정업종과 계층에 대한 믿기 어려울 정도의 혜택과 지역개발사업 약속들이 점점 노골적으로 나오고 있는 현상이 그것이다.
후보들은 어떤 구체적 실천 강령을 통해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는 권위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이를 민주주의적 제도로 정착시킬 것인가에 대해 아직은 종합적인 청사진을 내놓지 않고 있다. 모두들 자기만 당선시켜주면 민주화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식이고 대신 선심 공약을 남발하는데 더 많은 정력을 쏟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런 류의 공약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선심 공약이 실제로 이행 가능한 것인지의 여부는 제쳐놓더라도 대통령 후보로서는 걸맞지 않은 것들이 태반이다.
대통령은 전체 국민을 통치하고 국가예산을 공정한 우선 순위에 따라 분배해야 하는 나라의 통치자인데 요즘 나오는 공약들은 마치 지역선거구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회의원 후보들의 공약 같다.
이와 같은 공약들은 심해지면 국민들을 서로가 경쟁관계에 있는 이익집단으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감정으로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이 사분오열 될 위기를 맞고 있다고 걱정하는 판에 그와 같은 새로운 분열 요소가 가미되는 것은 지극히 경계해야될 사태다.
이 같은 행태는 선거의 전통이 확립되어 있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어느 특정 그룹에 대한 특혜는 다른 그룹의 똑같은 요구 또는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전국의 모든 그룹과 계층으로부터 골고루 표를 모아야 하는 대통령후보로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냉혹한 정치적 계산으로 따진다면 이번 선거가 4파면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그런 공약 관행은 개의할게 없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30% 좀 넘는 표면 당선이 가능하니까 여러 이익집단의 표만 모으면 되지 전체 국민들의 표를 골고루 얻는다는 전략은 낭비라고 판단하는 선거 전략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러한 전략이 은연중에 추진되고 있고 해당 유권자들이 선심 공약에 넘어간다면 그것은 이번 선거의 최대 쟁점인 민주화에 큰 손상을 일으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런 불행한 결과를 막기 위해서는 이번 선거의 최대 공약이 지역적·개별적 이익 추구보다 민주화를 가능케 할 의지와 구상을 중심으로 펼쳐지도록 유권자들이 관심을 집중시켜야 된다.
『어느 국민이나 그들에게 걸 맞는 정부를 갖게 마련』이라는 경구는 이번 선거에 임하는 우리 유권자들에게 지극히 무거운 책임을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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