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이익 다 털어도…화평법 시행에 화학물질 생산 포기하는 업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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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 제조·수입업체인 A사는 지난해까지 9개의 화학물질을 취급했다. 미생물과 화학물질을 조합해 흰개미나 좀나방, 곰팡이와 같이 건축물에 해를 입히는 유해균충을 막는 물질을 주로 생산한다. 일본 기업과 기술제휴로 30년째 탄탄한 회사로 커왔다. 좁은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100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강소기업이다.


하지만 올해부터 사업의 상당 부분을 접을 판이다.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이 시행되면서다. 이 법에 따라 연간 1t 이상 화학물질을 제조·수입하는 업체는 유해성 자료를 첨부해 환경부에 각 물질을 등록해야 한다. 정부와 갈등을 우려해 익명을 요청한 회사 관계자는 “9개 물질을 등록하는데 드는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3억원. 그런데 9개 물질을 등록하는데 드는 비용이 4억9000만원에 달한다. 생산을 강행한다면 영업이익은 고사하고 적자 기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2018년 6월까지 화학물질 510종 등록해야 #수억원 오가는 등록 비용에 관련 기업 휘청 #시험기관, 정부 지원 등 인프라도 부족 #규제 필요성 공감하지만 중소기업 씨를 말려서야

결국 A사는 6개 물질의 등록을 포기하기로 했다. 나머지 3개 물질 등록에 드는 비용도 만만찮다. 지난해 영업이익의 3분의 1이 넘는 1억3000만원이다. 정부 지원은 2500만원밖에 안 된다. 이 관계자는 “국민의 건강을 고려한 화평법의 취지에 공감한다”면서도 “그러나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책이나 등록기관확충과 같은 인프라도 없이 무조건 따르라는 건 기업을 한계로 모는, 기업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처사”라고 말했다. 등록을 포기한 물질 가운데는 A사가 수입하지 않으면 국내에 유통이 안 되는 것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2013년 제정된 화평법은 2015년 전면 시행됐다. 2018년 6월까지 물질 등록을 마쳐야 한다. 관련 기업이 화학물질을 환경부에 등록하려면 물질의 특성과 유해성 등을 담은 자료를 첨부해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자료만 최대 47종에 달한다. 물론 정부가 지정한 국내외 시험기관이 발급한 것만 허용된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이 발생한다.

본지가 시민마이크에 올라온 의견을 바탕으로 관련 6개 중소기업을 조사한 결과 등록비용은 물질당 평균 1억1590만원이 들었다. 몇 개 중소기업이 공동등록협의체를 구성해 n분의 1로 부담을 줄였는데도 이 정도다. 심지어 등록하는데 15억원이 소요되는 물질도 있다. 이러다 보니 등록비용이 영업이익을 초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생산을 포기하는 업체가 속출하는 이유다.

당초 10개 물질을 등록하려던 B사는 컨설팅을 받은 후 8개 물질의 수입을 중단하기로 했다. ‘포기하는 게 낫다’는 컨설팅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2개마저도 완제품 형태가 아닌 원료만 공급하기로 했다”며 “당장 매출이 줄겠지만 감당 못하느니 지금 접는 게 낫다는 판단”이라고 말했다.


2014년 4월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는 화평법 시행을 앞두고 관련 기업의 피해가 없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산업현장에선 공염불이다. 510종에 달하는 등록대상 물질 중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건 71종(13.9%)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저비용 시험자료에 집중돼 있다. ‘반복투여독성 시험’ ‘생식·발달 독성 검사’처럼 1종당 6000만~수억원이 소요되는 고비용 시험자료는 지원대상에서 빠져 있다.

환경부는 공동등록협의체를 구성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현재 등록대상 물질 510종 중 협의체가 구성된 건 285종(55.9%)뿐이다.

시험기관 등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화학물질을 등록하려면 전문 분석인력과 장비를 갖춘 시험기관을 통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정부로부터 지정 받은 국내 시험기관은 30개에 불과하다.

특정 시험자료는 아예 분석할 수 있는 국내 기관이 없다. 결국 해외로 나가야 한다.

또 화학물질을 등록하려면 공동등록협의체 구성, 시험자료 구매 및 비용 분담, 서류 작성 등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 정부의 지원은 거의 없다. 결국 전문성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컨설팅 업체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데 컨설팅 업체가 국내엔 6개뿐이다. 업체마다 비용도 천차만별이다. A업체 관계자는 “등록 물질이 정부 지원 대상인지 아닌지 등 간단한 확인만 요청해도 수수료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류연기 환경부 화학물질정책과장은 “510종 가운데 공동등록이 어려운 물질도 있다"면서도 "(중소기업의 호소가)과장됐다"고 말했다. 따라서 중소기업 지원책과 같은 후속 대책을 마련할 생각은 없다는 입장이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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