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법관의 솔선수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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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법의 위기」란 말은 어제오늘에 나온 얘기가 아니다. 시국관련 사건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피고인이나 그 가족 등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따위는 예사고 일반사건에서도 법관을 우습게 여기는 풍조가 나타나고 있다.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재판을 하는 법관을 윽박지르고 심판하려드는 기현상도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법복만 봐도 고개를 떨구고 법정에 들어서면 숙연해지던 지난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서글픈 현상이다.
어제 열린 전국 각급 법원장회의는 땅에 떨어진 법정의 존엄성과 질서를 바로 잡는 방안들이 논의됐다.
법정질서를 파괴하는 형사피고인과 방청객 등에게 법정모욕죄 등으로 다스리고 법관 스스로의 의지와 용기를 십분 발휘해 사법부의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부도 있었다.
이 정도의 처방으로 사법의 존엄과 권위가 되살아나고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리라고 여기는 사람은 드물성싶다. 사법부나 법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나 법정소란이 법정모욕죄나 발동하고 강경 대처한다고 해서 단번에 해결된다면 그보다 다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법을 치료하자면 병소부터 찾아내 범인을 규명해야 하듯이 오늘의 사법부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에 대해 냉철한 진단과 이를 기초로 한 처방과 냉엄한 자생 없이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파탄은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못해왔거나 못하고 있다고 일반이 인식하고 있는데서 연유한다. 다시 말해 사법부와 법관의 독립성이 지켜지지 않고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기인하는 것이다. 법관이 외풍에 쉽게 흔들리고 정의와 공정이라는 법의 궁극적 가치를 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외부 입김만 막으면 된다는 해답이 나올 수 있다. 구속영장 발부와 재판을 간섭하는 외부작용이 없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사법부의 의지 여하에 따라 능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법관 개개인의 투철한 사명의식과 결연한 의지도 요구된다. 그러나 하위직 법관보다 고위 법관들의 노력과 결단이 사법부의 독립을 구현하는데 보다 더 핵심임을 깨달아야 한다.
외풍을 앞장서 막아야하고 바람막이 구실을 해주어야 한다.
또 인사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소신 있는 판사가 인사때 불이익을 당하고 승진이나 법관재임용에서 제외되는 풍토에서 대쪽같이 꼿꼿한 판사를 기대하기란 무리다. 그런 의미에서 법원의 행정과 인사를 관장하는 고위직 법관들의 솔선수범이 더없이 요청된다.
새 헌법이 발효되면 법관 임명에 대법관회의의 동의절차를 거치도록 되어있지만 전보·승진 등 일반인사에서도 보다 객관적이고 민주적인 인사가 이뤄지도록 합의제 인사제도가 강구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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