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질외교에 뻘쭘해진 한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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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말레이시아 당국이 31일 김정남의 시신 인도와 북한인 용의자 출국을 허용키로 함에 따라 김정남 암살사건이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사건 발생 직후부터 말레이시아와 비공식 채널을 유지해온 우리 정부는 평양에 억류된 자국민 9명의 무사 귀환을 협상의 최우선 순위에 둔 말레이시아 측과 북한의 협상 결과에 당혹해하고 있다.  


이덕행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사건의 배후에 북한 정권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당국자도 본지 기자에게 “시신 및 용의자 인도와 무관하게 말레이시아 측은 사망자가 김정남이고, 화학무기인 VX가스가 사인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며 “앞으로도 수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18일 이정철 석방에 이어 나머지 핵심 용의자 3명마저 모두 이날 말레이시아를 빠져 나갔고, 구속 기소된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과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는 여전히 “장난으로 알고 있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의 기대와 달리 객관적인 상황은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기엔 역부족이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이번 사건에 개입하면서 한국 외교가 밀린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하고 있다. 루캉(陸慷)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국제관례에 따라 인도주의 차원에서 중국은 시신 경유에 필요한 협조를 했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말레이시아를 떠난 김정남의 시신은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신속하게 북한으로 옮겨졌다.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에 따르면 북측 대표단의 최희철 외무성 부상은 협상 과정에서 "사망자는 (김정남의 여권상 이름인) 김철"이라고 했고, "김철의 부인 이영희가 시신 인도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김용현 동국대(북한학과) 교수는 “북한 내에서는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의 존재를 주민들이 알지 못하는 만큼 비공개리에 흔적을 아예 없어버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차세현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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