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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비상실탄 64조원, 그의 입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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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중국 경제가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환율'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저평가된 위안화로 미국을 공략해 천문학적 무역 흑자를 내고 미국의 일자리를 뺏어갔다고 생각해서지요. 트럼프 대통령은 4월 말까지 한국은 물론 중국까지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놓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언론은 최근 "그럴 염려 없다"는 확신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입니다.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의 저우샤오촨(周小川·69) 행장입니다.


2002년부터 무려 15년간 중앙은행 총수를 맡고 있지요. 그래서 그는 'Mr. 런민비 人民幣)', 'Mr. 금융 대통령'이라고 통합니다.

저우샤오촨 인민은행장 [사진 중앙포토]

저우샤오촨 인민은행장 [사진 중앙포토]

그는 지난 3월 10일 저우 행장은 "올해 위안화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격) 기자회견에서지요. 그는 이어 "금리 격차가 계속적 투기를 유발하지 않을 것이며 금리는 대체적으로 국내 경제에 기반할 것"이라고 말했지요. 직전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향후 5년간 중국 경제성장률 목표를 6.5%이상으로 제시하자 이에 따른 환율 정책을 밝힌 겁니다. 동시에 미국의 일방적 환율 압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중국 언론이야 그의 환율 리더십에 박수를 보냈지만 국제 경제는 미·중 환율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전이 될 것이라고 분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한국도 긴장합니다.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오는 10월 종료를 앞두고 있는 3600억 위안(약 64조원) 규모의 한중 통화스왑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국 경제의 비상 실탄, 64조원이 그의 입에 달렸다는 얘깁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왼쪽)가 지난해 7월 중국 청두에서 열린 주요 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 총재와 만났다 [사진 중앙포토]

유일호 경제부총리(왼쪽)가 지난해 7월 중국 청두에서 열린 주요 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 총재와 만났다 [사진 중앙포토]

저우샤오촨은 1948년 1월 장쑤(江蘇) 이싱(宜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저우졘난(周建南, 1917-1995)은 제1기계공업부 부장을 역임했지요. 아버지가 장관을 했으니 그는 중국판 금수저, 즉 태자당(혁명 원로나 고위 간부 자녀들의 정치세력)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저우졘난은 상하이 교통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대학 10년 선배지요. 한데 그가 제1기계공업부 부장 시절 장쩌민이 그의 부하직원이었습니다. 저우졘난은 선배로서 직장상사로서 장쩌민을 끔찍하게 아끼고 지원했다고 합니다.
1995년 암으로 투병중인 저우졘난을 장쩌민이 찾자 “자네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 나의 희망”이라고 말했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장 전 주석이 그만큼 실력이 있고 대인관계가 좋았다는 얘기이기도 하지요

부장(장관)을 지낸 아버지덕에 저우샤오촨은 베이징 8중을 1966년 졸업합니다. 문화대혁명의 폭풍에 휘말려 그는 농촌으로 하방됐으며 1972년 공농병 대학생의 신분으로 베이징 화공학원에서 공부를 했지요.

저우졘난 부장 [사진 바이두]

저우졘난 부장 [사진 바이두]

대학을 졸업한 이후 저우샤오촨은 베이징시 자동화기술연구시스템연구실에 배치받았고 이후 칭화(靑華)대 기계연구원 시스템공정응용공작연구생에 합격합니다. 1982년 칭화대 박사과정을 밟았으며 당시 그와 함께 박사과정에 입학한 사람으로는 쉬상둥(徐向東) 칭화대학 열에너지 공학 교수가 꼽힙니다.    

그는 공학을 전공했지만 1979년부터 경제체제개혁정책 및 경제과제를 집중 연구하면서 경제학을 섭렵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1985년 박사학위 취득 후 저우샤오촨은 칭화 경영대학원에서 초빙 겸직교수로 석사 및 박사 연구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84년부터 칭화대 경영대학원 원장 및 교수를 역임하고 있던 주룽지 전 총리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저우샤오촨은 주룽지를 중심으로 하는 칭화방의 주역으로 승승장구합니다. 시진핑 주석의 권력 파트너로 불리는 왕치산 당 기율위 서기 역시 주룽지 계열의 인물입니다. 또한 저우샤오촨이 칭화대 겸임교수로 활동할 무렵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칭화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시 주석은 법학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저우샤오촨이 시의 박사학위 취득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주룽지 전 총리의 강연 · 인터뷰 내용을 실은 책 ` 주룽지 기자 질문에 답하다 ` 의 표지 [사진 중앙포토]

주룽지 전 총리의 강연 · 인터뷰 내용을 실은 책 ` 주룽지 기자 질문에 답하다 ` 의 표지 [사진 중앙포토]

칭화대 교수직과 함께 1986년에는 국무원 체제개혁방안 영도소조의 멤버로 활약하면서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소 부소장까지 올라갑니다.

당시 저우샤오촨은 급진적인 대외무역 체제개혁을 건의하기도 했으며 이중가격제(雙軌制度, 동일 제품에 대해 계획범위 내에서는 국가고시가격을, 계획범위 밖의 부분에 대해서는 시장가격을 적용)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1년 상하이시 서기에서 국무원 부총리로 베이징에 입성한 주룽지는 연구원 부소장이던 저우샤오촨을 중국은행 상무이사로 발탁합니다. 1995년에는 외환관리국 국장을 맡으면서 적극적으로 런민비의 자율태환을 추진했지요. 이듬해에는 중앙은행인 인민은행 부행장으로 임명되는 등 쾌속승진을 이어갑니다.

1998년에는 건설은행장에 취임했으며 2000년에는 중국증권관리감독위원회 주석으로 영전합니다. 그리고 2002년 12월에는 인민은행장으로 취임하지요. 그가 꿈에 그리던 중국의 금융 대통령에 오른 겁니다.

이후 중국은 WTO가입에 따른 금융시장 개방, 중국은행 공상은행 등 국유상업은행의 증시상장, 2005년 7월 위안화 고정환율제 탈피를 선언하는데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정책들입니다.

저우샤오촨이 단행한 일련의 금융개혁 정책의 기조는 시장화입니다. 금융시장과 금융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줄이고 시장에 맡기자는 정책이지요.

저우샤오촨 행장 [사진 바이두]

저우샤오촨 행장 [사진 바이두]

2008년에는 부총리로의 승진이 예상됐습니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인 개방정책은 지방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그는 인민은행장 유임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지요. 저우샤오촨이 지방근무 경력이 없었다는 점도 마이너스 요인이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달러화 위주의 경제체제에 우려가 일었고,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은 달러화 최대 보유국인 중국에게는 뼈아픈 환차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에 2009년 저우샤오촨은 인민은행 웹사이트에 올린 기고를 통해 “현재 국제 통화 시스템 본연의 취약성과 시스템 상의 결함이 우려스럽다”며 “개별국가와 무관하며 장기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축통화가 필요하다”고 언급해 세계 금융시장에 기축통화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올해 말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그의 거취에 대한 논란이 분분합니다. 현재 중앙위원인 그가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원에 오를 수 있느냐는 거지요. 그의 올해 나이는 69세입니다. 중국 정계에서는 칠상팔하(七上八下) 원칙이 있지요. 국가 최고 지도부 선임 당시 나이가 67세면 가능하고 68세면 퇴직해야 한다는 관례입니다. 이 관례에 비추면 그의 퇴직이 유력합니다. 그러나 금융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이나 트럼프 시대 미중 환율 전쟁 등 향후 험난한 중국 경제를 고려하면 그의 금융권력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차이나랩 최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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