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 음악

성숙한 다름의 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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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경영한양대 교수·음악학자

정경영한양대 교수·음악학자

연주는 어렵다. 우리 삶이 그런 것처럼. 그저 악보에 그려진 기호를 틀리지 않게 재현한다고 연주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속과 전통, 관습을 체화해야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악보에 드러나지 않는 관습과 전통마저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 관습과 전통의 역사성을 살피고 자신의 맥락에서 적용하고 해석해 오히려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새로운 전통과 관습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한 연주자가 된다.

김선욱 피아노 리사이틀

지난 18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노 독주회(김선욱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선택한 곡은 수많은 연주자의 전통과 관습, 청중의 익숙한 경험이 이미 두텁게 쌓여있는 것이었다. 바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비창), 14번(월광), 23번(열정)이다.

그러나 그의 연주는 달랐다. 우선 8번(비창)이 그랬다. 그는 소나타 형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등장하는 서주 부분을 매우 강조해서 연주했다. 특히 감7화음의 강렬한 부딪힘이 딸림화음으로 해결되는 부분을 관습적 연주보다 훨씬 더 느리게 연주함으로써 이 부분이 더욱 강렬하게 들리도록 했다. 그의 해석은 설득력 있었다. 악장을 통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서주는 이 악장에서 가장 특이한 구조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흔히 서주부는 소나타 형식에서 반복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서주부는 이 악장뿐 아니라 뒤이어 등장하는 (표면적으로 매우 다르게 들리는) 2, 3악장 주제의 모든 음악적 단초를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지난 18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 소나타 세 곡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 빈체로]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지난 18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베토벤 소나타 세 곡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 빈체로]

혹은 14번(월광)의 1악장이 그랬다. 김선욱은 이 악장을 관습보다 무심하게 시작했다. 그 무심함은 곡의 시작 부분이 실은 이야기의 진짜 시작이 아니라 전주였음을 연주 자체로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관습보다 약간 빠른 템포는 이 악장이 이 악장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다른 악장과의 관계 안에 있는 것임을 지시하고 있었다. 전체를 조망하는 그의 안목이 돋보였다.

23번(열정) 역시 음악이 품고 있는 드라마를 세련된 기술과 효과적인 다이내믹으로 잘 표현하고 있었다. 2악장에서 3악장으로 쉬지 않고 넘어가는 베토벤의 극적 장치가 그의 손에서 극대화됐다.

내게, 그의 ‘다른’ 연주는 치기 어린 것이 아니라 성숙한 것이었다. 두터운 관습과 전통의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을 넘어 음악 앞에서 오롯이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치열한 노력의 아름다운 결과물 앞에 엉뚱하지만 나는 더 열심히 살겠다고 결심했다.

성숙한 연주는 어렵다. 마치 성숙한 삶이 그런 것처럼. 그러나 어쩌겠는가, 두터운 관습과 전통의 편견을 넘어 얻어낸 성숙함이 이리도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저 틀리지 않는 삶이 아니라 성숙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이라고 마음을 다해 믿는다면.

정경영 한양대 교수·음악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