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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도 캐비닛 대신 대통령 비서실장을 공개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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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용호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신용호정치부 부데스크

신용호정치부 부데스크

참담한 겨울이 지났다. 5월 9일에는 대선을 치른다. 이번에는 좋은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새 대통령에겐 정권 인수위가 없다. 당선되자마자 청와대 비서실을 꾸리고 조각을 해야 한다. 이런 초유의 상황을 우려해 일각에선 섀도 캐비닛을 공개하라고 한다. 새 대통령의 비전을 인선으로 보여달라는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예비 장관들을 검증하고 정부 출범 즉시 청문회를 갖자는 취지도 곁들인다. 뜻에는 백번 공감한다. 하지만 섀도 캐비닛 공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자칫 명단을 공개했다 특정 집단 줄 세우기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특히 공무원 말이다. 캠프가 명단을 내놨다 스스로 지지층을 좁히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이래저래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다른 요구를 할까 한다. 대선주자들의 대통령 비서실장을 미리 공개해 달라는 주문이다. 그들의 통치 비전을 실장을 통해 보자는 것이다.

대통령의 그림자인 실장, ‘노(No)’를 할 수 있는 인사로 #대선 전 누구인지 밝혀 어떤 대통령 될지 비전 제시해야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그림자다.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을 바로 옆에서 보좌한다. 총리나 경제부총리, 국정원장처럼 직접적 권한은 없지만 상황에 따라 그들의 힘을 모두 가질 수도 있다. 대통령과 뜻만 맞는다면 무소불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대통령의 성패 여부를 비서실장에서부터 찾기도 한다.

최순실 사태를 겪으며 비밀스러운 국정 운영의 정점에 비서실장이 있다는 것을 다시 인식했다. 김기춘 전 실장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지시 등의 혐의로 구속된 신세다. 재임 시 그의 위세는 막강했다. 정치권은 물론 관가와 재계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눈치를 봐도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대통령의 뜻은 비밀스러워야 한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었다. 그는 윗사람을 받드는 일에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 힘은 상당 부분 대통령의 뜻을 고스란히 받드는 데서 나왔다. 여론이 그토록 그를 물리라 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말을 듣지 않았다. “사심이 없는 분”이라며 두둔만 했다. 두 사람의 불통 스타일은 너무나 닮았었다. 실장이 오히려 대통령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보다 강화시키는 격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내내 그런 스타일의 실장을 선호했다.

그런 만큼 새 대통령은 더 이상 ‘예스맨’을 비서실장으로 둬선 안 된다. 대통령의 생각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기보다 까칠한 시중의 여론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실장을 택해야 한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생전 일화는 ‘노(No)’라고 말하는 실장을 택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1993년 2월 비서실장 인선을 놓고 고민 중일 때였다. 한 측근이 상도동 자택을 찾아 “박관용(전 국회의장)보다는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김덕룡(전 의원)이 적임입니다”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YS는 고민 끝에 박관용을 택했다. 이제 중진 의원이 된 그 측근은 “가신그룹의 핵심인 김덕룡은 직언을 서슴지 않아 거북했던 모양이야. 지분이 있으니까. 이기택계 출신인 박관용은 일처리는 깔끔했지. 다만 강하게 주장을 펴는 스타일은 아니었어. 결국 편한 사람을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YS의 선택이 옳았느냐 틀렸느냐가 아니다. 정치력이 출중했던 YS도 자신에게 ‘노’라고 말하는 실장은 부담스러워했다는 점이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실장을 선택하는 게 그만큼 쉽지 않지만 새 대통령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선 총리보다 비서실장이 국정에 더 밀착돼 있음도 봤다. ‘승지가 정승·판서보다 낫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총리는 나중에 보여줘도 된다. 실장을 미리 공개해 ‘내가 어떤 대통령이 될 것’인지를 보여주기 바란다. 정책·공약도 좋지만 실장의 예고는 국민이 후보를 판단하는 훌륭한 잣대가 될 게다. 대통령에게 ‘아니다’며 가감 없이 직언하는, 그래서 대통령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실장을 미리 보고 싶다. 대통령이 완벽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이 필요하면 경선 후 정당의 후보가 된 다음 공개하면 된다. 유일하게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가 한 인터뷰에서 “비서실장은 지향과 정체성이 같은 분을 뽑을 것”이라고 일단을 거론했다. 조금 더 나아가 이름 석 자를 내놓기 바란다.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다. 그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사고, 득표하라.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