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화합 절실"-성경구절까지 인용했던 속사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오직 공법(共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담은 헌법재판소의 결정문 86쪽에는 이같은 성경 문구가 등장한다. 구약성서 아모스 5장 24절에 나온 구절이다. 안창호(60) 재판관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지적하는 보충의견을 내면서 활용했다.

그는 이 문구의 의미를 이번 국정농단 사건과 연결지어 ‘불법과 불의를 버리고 바르고 정의로운 것을 실천한라는 말씀’이라고 설명했다. 안 재판관은 ‘투명하고 공정한 권력행사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한다’는 대목에서도 ‘이사야 32장 16~17절을 참조하라’고 주석을 달았다. 

곳곳에 성경 문구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 헌재 내부 관계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안 재판관이 이번 재판을 진행하면서 ‘같은 신자들 만이라도 통합하고 설득해보고 싶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그가 낸 보충의견서엔 탄핵심판 92일을 기록한 헌법재판관의 말못할 마음고생도 반영돼 있다. ‘이 사건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고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이다’는 문구에서다.

'진보와 보수'를 직접 거론한 배경에 대해 헌재 안팎에선 "보수 성향으로 분류돼 탄핵 기각 의견을 낼 가능성 높은 재판관으로 회자된 게 적잖은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헌재 내부 관계자는 "그런 세간의 인식을 의식해 보충의견 작성을 결심하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안 재판관은새누리당 추천으로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9월 헌법재판관에 취임했다. 


안 재판관은 보충의견서에서 ‘이 사건 탄핵심판청구를 기각한다면’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박 대통령 파면의 정당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정경유착 등 정치적 폐습이 확대ㆍ고착될 우려가 있다. 이는 현재의 헌법질서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적 가치와도 충돌하고 청렴한 사회를 구현하려는 국민적 열망에도 배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 파면 결정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안 재판관 뿐만이 아니다. 헌법재판관 8명은 모두 국론 분열·대립의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헌재 내부 관계자는 “이정미 권한대행의 선고일 당일 ‘헤어롤 출근’도 그런 차원의 해프닝이었다”고 설명했다.

재판관들의 만장일치 ‘파면’ 결정은 이같은 고뇌의 산물이었다. 항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재판관 전원은 검찰 수사기록 등을 검토하고 증인신문을 거듭해가며 ‘인용(파면)’ 결정을 자연스럽게 모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뇌물죄 등 형사법 위반 부분을 적시한 국회의 탄핵소추 사유를 ‘사인의 국정개입 허용·대통령 권한남용’ 부분에 넣어 개별 쟁점으로 판단하지 않기로 한 것도 일치된 결정이었다고 한다. 

헌재 내부 관계자는 “일부 재판관들은 대통령 대리인단의 막말변론이 극에 달했을 때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헌법재판관을) 그만 두고 싶다’며 괴로움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윤호진 기자 yoongo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