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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바랴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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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박지인 제물포항을 빠져나오던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varyag)호는 일본 함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102년을 거슬러 1904년 2월 9일, 일본이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를 하기 하루 전이다.

승무원 557명 가운데 37명이 전사하고 190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결코 백기를 올리지 않았다. 대신 자폭해 평택 풍도 앞바다에 가라앉는 길을 택했다. 수병들은 보트로 탈출했다. 러시아 해군이 자랑하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 바랴크'의 신화다. 한반도 '침략권'을 놓고 벌인 싸움에서 패한 것을 영웅적인 항거로 윤색한 것이다.

일본은 이를 건져 수리한 뒤 자국 군함으로 쓰다가 1916년 러시아에 반환했다. '끝내 조국에 돌아온 바랴크'라는 신화를 추가한 이 배는 1923년 해체됐다.

사실 '바랴크'는 러시아인에게 특별한 낱말이다. 9세기 모피.꿀 등을 찾아 러시아 땅에 정착한 스칸디나비아 출신 바이킹 무리를 일컫는다. 이들은 러시아 최초의 왕국인 '키예프 루시' 를 세웠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의 공통 기원으로 통한다. 러시아라는 말도 루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러시아인의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 황해에서의 신화까지 보태면서 '바랴크'는 러시아 해군의 명예를 상징하게 됐다. 그래서 이 이름은 65년 취역한 정예 미사일 순양함에 대물림됐다. 2004년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해 인천을 방문한 배다.

같은 이름이 85년 제작에 들어간 최대 6만7500t급 항공모함에도 붙여졌다. 하지만 이 항모는 소련 몰락으로 예산이 없어 완성되지 못했다. 과도한 군비 경쟁과 비효율적인 경제 운용으로 무너진 소련 공산체제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배는 98년 경매에서 2000만 달러에 홍콩 기업으로 넘어갔다. 마카오에서 선상호텔과 도박장으로 사용한다고 했지만 웬일인지 중국 군항인 다롄(大連)에서 발견됐다. 무료 인공위성 이미지 서비스인 구글 어스(http://earth.google.com)를 이용해 이 지역(북위 38도55분, 동경 121도38분)을 살피면 부두에 정박한 항공모함의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다.

중국이 이를 수리해 자국 항모로 사용할지 모른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100년을 사이에 두고 서해에 다시 나타난 바랴크가 동북아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궁금하다.

채인택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