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VX 암살로 9년 만에 재지정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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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새 행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기 위한 본격적인 검토에 착수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27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열린 북핵 6자회담 한·미·일 수석대표 협의에서 미국 측은 김정남 암살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전제하에 테러지원국 재지정 검토에 착수했음을 밝혔다”고 전했다. 미 정부가 한·미·일 3국 간 다자 협의 무대에서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문제를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은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이듬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지만 2008년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폭파하고 핵 검증에 합의하면서 해제됐다. 이번에 지정되면 9년 만에 다시 테러지원국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현재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 있는 국가는 이란·수단·시리아 등 3개국이다.
정부 관계자는 “그동안 미 정부가 매년 정례적으로 (테러지원국 재지정 문제를) 검토해 왔지만 이번 경우는 김정남 피살 때문에 검토가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미 정부의 대북 정책은 당분간 강경으로 흐를 수 밖에 없을 전망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미 유엔과 각국의 독자적 제재가 강화돼 있어 테러지원국 지정에 따른 추가 제재는 별다른 게 없고 상징적 효과가 따를 뿐”이라며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되더라도 (북한이) 비핵화 테이블로 돌아온다면 협상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외교·경제적으로 ‘국제적 추방’을 뜻하는 테러지원국 지정 조치를 추진하면서 선뜻 대화에 나설 순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미 의회와 한국·일본 등 동맹국들은 김정남 암살 사건을 계기로 트럼프 정권에 북한에 대한 압박 수위를 한층 높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일 양국 정부로선 그동안 보조를 맞춰 왔던 ‘압박과 제재’ 노선에서 혹시라도 트럼프 정권이 이탈할 여지를 없애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특정 국가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려면 테러를 직접 자행했거나 지원한 행위, 테러에 사용됐거나 사용될 물자를 제3자에게 제공한 행위, 테러 행위자에 대한 은신처 제공 등의 구체적 혐의가 최종적으로 입증돼야 한다. 김홍균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가나스기 겐지 일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이날 발표한 ‘공동성명’에 테러지원국 부분이 빠진 것도 이 때문이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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