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황량한 땅, 죽음에 몰린 호랑이 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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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모래밭에 호랑이 발자국이 뵈는가 싶더니, 화면 앞으로 털이 누런 짐승이 다리부터 걸어나온다. 설마했는데, 진짜 시베리아 호랑이다. EBS가 제작한 2부작 특집 다큐'밀림 이야기'(14, 15일 밤 10시)의 제1부'시베리아 호랑이 3대의 죽음'(사진)은 이렇게 시작한다.

공들인 근접 촬영 덕에 오도독 오도독 사냥감을 씹어먹는 소리, 뽀드득 뽀드득 눈밭을 걷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려온다. 영특한 호랑이들은 손가락만한 카메라를 어떻게 눈치챘는지, 그 앞에서는 영락없이 걸음을 멈추고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먼 거리에서 잡은 호랑이의 사생활 역시 좀체 보기 힘든 장면이다. 고양이처럼 배를 내놓고 뒹구는가 하면, 냇가에서 물을 들이켜는 새끼들을 느긋이 지켜보는 품새가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모습이다.

그러나 감탄도 잠시. 이들이 사는 러시아 연해주 일대는 '밀림'으로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황폐해져버렸다. 처음 네 마리였던 호랑이 가운데 1남 2녀의 어미 호랑이는 첫해 겨울이 끝나기 전에 밀렵꾼의 총에 맞아 죽었고,수컷 새끼는 이듬해 여름 올무에 목이 졸려 숨진 채로 발견된다. 남은 암컷 두 마리도 황폐한 숲에서 새끼를 키우기가 영 쉽지 않다.

"먹잇감을 놓고 사냥 장면을 찍는 식의 연출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사람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서 호랑이들의 은밀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고 싶었습니다."

이미 1997년에도 한 차례 시베리아를 무대로 자연다큐를 만들었던 박수용PD는 "그때는 화면에 호랑이를 담는 데 급급해 이것저것 살필 여유가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제작진이 땅속에 반평 크기의 참호를 파고 숨죽인 채 지켜본 시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호랑이들이 처한 생존의 위기를 강력하게 전달한다.

박PD를 포함, 이효종.장진.순동기 등 네 명의 연출자 겸 촬영진은 2001년 10월~2002년 5월, 다시 2002년 11월~2003년 5월 등 모두 1년간 호랑이를 지켜봤다. 제2부 '침묵의 추적자'에서는 제작진을 포함, 인간과 호랑이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소개될 예정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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