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나 해볼까”하는 중년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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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중년 프로젝트 사전]
‘깨다’-꽃중년의 재취업 

기업에서 요직에 계셨던 선배들에게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나도 정치나 해볼까” 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분들일수록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개인적으로 당황하게 되는 질문이긴 하다.

하지만 그 마음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현재 정치 현실이, 정치라는 분야가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직업인 양 느껴지게 한 부분도 있기에, 재취업을 희망하는 중년에게는 정년이 없어 보이는 그 자리가 충분히 ‘미래 먹거리’로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치하는 선배들에게서는 “나도 돈이나 벌어볼까”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어느 자리든 중년이라는 포지션은 자리 유지 자체가 녹록지 않기에 나오는 뼈아픈 구두선(口頭禪)이 아닐까 싶다.

“사표 내고 창업이나 하지 뭐. 와인 바 하면 잘 될 것 같은데, 고깃집도 괜찮고. 어때? 내가 인맥은 좀 되잖아. 허 박사도 올 거지?” 일명 ‘임시 직원’이라고 칭하는 그 자리가 무겁기 때문에 하시는 농담인듯 농담아닌 농담 같은 질문이다.

그런데 그 작은 질문에 ‘을’의 위치에서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갑질’이 심했던 고객이 그런 질문을 하면 겉으로야 웃지만 사실 “농담도 잘하셔”라고 마음속 답변이 울린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갑’이라는 지위에 고개 숙여야 했던 ‘울트라 을’의 처지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같은 마음 아닐까. 지금 배경이 되어 주고 있는 ‘자리’라는 포장을 벗기면, 자신도 그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순진한 착각일 듯싶다.

반대의 경우도 분명 있다. 평상시 수평적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였던 ‘갑’이라면 차원이 다르다. 그런 분들은 인간적으로도 존경하게 되었기에 퇴직을 하시더라도 사람들을 모아 계신 곳이 어디든 달려 갈 용의가 있다.

모 방송사를 퇴직한 지 벌써 5년차가 된 지인은 전보다 지갑 사정이 훨씬 더 나아졌다고 자랑한다. 기존에 좋은 관계를 맺었던 ‘을’이자 후배들이 다들 자리를 잘 잡아 그 지인을 서로 고문이나 이사로 모시려 하다보니, 환갑을 훌쩍 넘겼음에도 몸값이 예전 못지않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건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었다. 공생(共生) 원칙을 지키며 상생할 수 있는 먹거리를 진심으로 고민해주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하루하루 바쁘게 사는 후배들에게는 먼저 연락을 하는 선배였다. 그렇게 ‘을’이 아닌 ‘인연’으로 대해주던 마음을 알기에 후배들 또한 상황이 역전 되었을 때 기꺼이 그를 도와주려 했던 것이다.

명예로운 재취업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 “정치나 해볼까”하는 말처럼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는 것은 도전 정신이 아직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다만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분야 전문가의 일을 쉽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은퇴자 1000명에게 가장 후회하는 것을 물었더니 ‘명함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이라는 대답이 2위를 차지했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야 벌거벗은 개인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특히 높디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일수록 더 심한 박탈감을 느낀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미생』의 명대사처럼, 세상으로 나온다는 것은 청년에게도 중년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옥을 견뎌낼 만한 갑주(甲)가 필요하다. 사람이든, 기술이든, 명함이든.

허은아

(주)예라고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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