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탤런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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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느날 저녁 퇴근 무렵이었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어느 부인이 10세 남짓한 사내아이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국민학교 3학년에 다니는 그 아이를 TV드라머에 꼭 출연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연기수업 경험은 없지만 워낙 총명하고 평소에 하는 짓거릴 봐서는 틀림없이 잘할 수 있을 거라면서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것이었다.
난 부인에게 아이들의 TV출연은 성격형성이나 자신감 부여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학업에 지장을 주고 자칫하면 순수성을 해칠 수도 있다는 점을 들어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석달동안 난 그 부인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야했고 끝내는 부인의 간청에 못 이겨 한번 출연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부모들은 왜 아이들을 TV에 출연시키려고 그렇게 성화들인가.』 『자기 만족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해서인가.』 PD들은 종종 의문을 가지며 방송국 로비에서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많은 부모들을 회의에 찬 시선으로 보곤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어느날 저녁 3일간의 야외촬영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때 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는 딸이 TV에 출연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학교에서 단체로 출연하는 어린이게임 프로인데 오늘 녹화를 마쳤다는 것이었다.
『그래? 방송이 언젠데?』 『일요일이래요!』 아내도 역시 즐거운 모양이었다.
방송이 되던 날 늦잠을 잔 나는 내 게으름을 수없이 탓하면서 불행중 다행(?)으로 비디오로 녹화된 테이프를 수없이 틀어댔다.
딸아이 단독으로 나오는 장면은 애당초 생각도 안했지만 화면속의 아이 모습은 식구들만이 확인할 수 있는 순간적인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중에 끼여있는 딸아이의 모습이 비쳐질 때마다 우리 부부는 낄낄거리며 턱없이 좋아했다. 때로는 정지화면을 만들어 오랫동안 감상하기도 했다.
기쁨과 흥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일전의 일이 떠오르며 몹시 부끄러워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가 느꼈던 흥분과 나를 찾아왔던 부모들이 기대하는 심정은 같은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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