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죽이기 더 못 참겠다" 배수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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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식 경찰청 차장이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 수사에 대한 정면 대응을 밝혔다. 회견도중 자신의 예금계좌 내역이 적힌 종이를 펼쳐보이고 있다. 신인섭 기자

23일 오후 3시30분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 2층 기자실에 최광식 경찰청 차장이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게 나타났다. '윤상림씨 사건'과 관련한 검찰의 내사에 대해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다. 최 차장은 정복 대신 사복차림이었다. 브리핑룸이 있는데도 기자실을 고집했다. 그는 "경찰청장 직무대리가 아니라 경찰관 최광식의 입장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며 개인 자격의 기자회견임을 강조했다.

최 차장은 미리 준비한 A4 용지 2장 분량의 '윤상림 수사와 관련한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읽어 내렸다. 그는 "여러 의혹에 있어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며 "조직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몇 번씩이나 사퇴를 생각했다"고 심정을 밝혔다. 그러나 "여러 의혹에 대한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는 상태에서 사퇴하는 것은 억측만 불러 일으킨다"며 사퇴 불가의사를 분명히 했다.

최 차장은 그 이유로 "경찰청장 직무대리 신분이기 때문에 저의 사퇴로 경찰조직의 혼란과 동요가 있을 수 있다"고 들었다. 또 "경찰 흠집내기에 이용당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온갖 수모를 참는다"고도 했다. 최 차장은 정면 돌파를 선택하기까지 숙고를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22일 밤 늦게 강희도 경위의 상가를 문상하고 돌아온 최 차장은 23일 오전 예정된 간부회의를 취소했다. 긴급한 서류만 결재하면서 자신의 거취를 고심했다. 한편으론 경찰 내부의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경찰청의 한 간부는 "최 차장이 '나는 결백하다. 그러나 조직을 위해서 내 거취 문제를 빨리 결정해야 하는데 지금 그만두면 (최 차장이 브로커 윤상림씨와 불미스러운 돈거래가 있다는) 검찰 주장을 확인하는 셈이 돼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경찰 내부에선 강경론이 우세했다. 일부 참모는 최 차장에게"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버텨야 한다""차장이 검찰에 먼저 수사를 요청해야 한다" 등을 주문했다. 허준영 전 경찰청장, 황운하 수사권조정팀장 등과 함께 대표적인 '수사권 독립론'자인 최 차장의 자진사퇴는 경찰을 압박하는 검찰에 또 다른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 차장은 이 같은 건의를 받아들였다.

경찰의 강경 기류에는 지난해 수사권 조정과정에서부터 축적돼 온 검.경 갈등 구조가 집약돼 있다. 지난해 허준영 경찰청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경찰은 숙원사업인 '검찰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청와대.국회.언론 등을 상대로 공세적인 자세를 취했다. 특히 고시나 경찰대 출신 등 경찰 내 엘리트 그룹은 공개적으로 검찰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경찰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던 수사권 조정논의는 지난해 연말 '시위 농민 사망 사건' 때문에 허 전 청장이 물러나면서 제동이 걸렸다. 그래서 상당수의 경찰 간부는 "사건의 실체와는 별도로 이번 최 차장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경찰 기죽이기'용으로 진행됐다"고 말한다. 경찰청의 한 고위 간부는 "검찰에서 최 차장의 혐의가 입증되지 않을 경우 검찰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강경대응의 배경을 설명했다.

여차하면 대대적인 검찰 성토 작업에 나설 태세다. 하지만 최 차장의 게이트 연루설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지금까지 수사권 조정 논의에 앞장서 온 경찰 수뇌부는 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많은 네티즌은 검.경 갈등에 대해 "공권력의 양대 축인 검찰과 경찰이 조직적 세대결을 벌이며 사회불안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철재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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