恨 맺힌 징용자 가족 또 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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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공무원 정모(40.충남 공주시)씨는 일제 때 징용당해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평생을 장애인으로 지낸 아버지(1998년 사망)가 보상금 3억5천만원가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2001년 9월 전주의 高모(78)씨 사무실로 찾아가 소송비용으로 40만원을 지불했다.

金모(66.여.전북 전주시 덕진동)씨 역시 징용됐던 시아버지에 대한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소송 대행비 30만원을 만들어 高씨에게 건넸다.

전주지검은 6일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해주겠다며 일제 때의 징병.징용 피해자 가족 8천6백여명으로부터 소송 비용 등의 명목으로 15억여원을 받아 챙긴 혐의(특가법상 사기)로 高모(78)씨를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高씨는 2001년 전주에 '일본강점기 한국인권권익문제연구소'라는 사무실을 차려놓고 20여명의 중간모집책까지 두고 피해 보상금을 대신 받아준다는 소문을 퍼뜨린 뒤 피해자들로부터 1인당 20만~50만원씩 받았다.

高씨는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가 50여년 전 징용됐던 사람 1인당 5천~6천엔씩의 공탁금을 법원에 맡겼으며, 일본이나 미국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 물가상승률과 이자 등을 감안해 5억~10억원 정도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왔다는 것이다.

검찰수사 결과 高씨는 징용되지 않은 사람들도 징용자 연령(20~45세, 현재 77~1백2세)에 해당할 경우 호적등본.주민등록등본.인감증명서 등 관련 서류만 제출하면 집단소송을 통해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속여 농촌지역 고령자들을 집중 공략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高씨와 모집책들은 일본어로 작성된 판결문 등을 피해자 가족 등에게 보여주는 등의 교묘한 수법을 사용했으며, 모집책은 모은 소송비용의 절반을 수당으로 받아왔다.

모집책 장모(59.충남 홍성군)씨는 징용자 4백6명을 모은 뒤 이들의 소송비용 1억2백만원을 농협에서 대출받아 미리 납부한 뒤 수당을 챙기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주지검 박장수 부장검사는 "高씨는 일제 징집피해자 가족들의 모임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회원으로 일하면서 범행을 계획했다"면서 "전국에서 피해 진정서가 계속 접수돼 피해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상금=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강제 징집된 한국인 군인.군속 등에 대한 미지급 노임 및 저축금 수백~수천엔씩을 법무성에 공탁했으며, 우리 정부는 1966년 관련법을 마련해 본인이나 피해자의 후손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했다. 82년 관련법들이 모두 폐지되면서 추가보상은 불가능한 상태다.

사단법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91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도쿄재판소에 보상금 청구 소송을, 2000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에 강제징용에 관련된 미쓰이 등 일본 기업을 상대로 임금 청구소송을 제기했었다.

일본정부에 낸 소송은 1심(2001년 1월).2심(2003년 7월)에서 잇따라 패소했다.

전주=장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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