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이 더 큰 국민참여재판? 절도 벌금 50만원인데 배심원 수당은 222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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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도 억울헌게(억울하니까) 나왔죠."

17일 오전 10시50분 전북 전주시 덕진동 전주지법 1호 법정 앞에서 지팡이를 든 조모(72)씨가 부인과 함께 서성였다. 법정 앞에 붙은 재판 안내문에 적힌 '피고인 조○○'이 바로 그다.

옆집에서 돌을 훔친 혐의(절도)로 기소된 조씨는 이날 오전 11시부터 형사3부(부장 정인재) 심리로 열리는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원에 나왔다. 조씨는 법정에 들어가기 전 '돌은 왜 가져갔느냐'는 물음에 "못 쓰는 돌을 쓰고 돌려주려고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조씨 사건은 전북 지역에서 고정사건에서 넘어온 형사사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는 첫 사례다. 고정사건은 피고인이 서면심리에 의한 벌금 또는 과료 형을 정하는 약식명령에 불복해 공판정에서 이뤄지는 정식재판을 말한다. 조씨는 지난해 5월 18일 오후 2시30분쯤 김제시 연정동 6촌 동생인 조모(66)씨의 집에서 가로 20㎝, 세로 30㎝, 폭 10㎝ 크기의 조경석 3개를 손수레에 싣고 가져간 혐의로 기소됐다.

16일 오전 전주지법 1호 법정 앞에 붙은 재판 안내문. 전주=김준희 기자

16일 오전 전주지법 1호 법정 앞에 붙은 재판 안내문. 전주=김준희 기자

당초 검찰은 지난해 7월 29일 조씨를 벌금 5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법원도 검찰이 넘긴 금액대로 약식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조씨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그해 9월 18일 "훔칠 의도가 없었다"며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 10일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한테 유무죄를 판단받고 싶다"며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조씨의 국선변호인인 홍의진 변호사는 이날 일반인으로 구성된 배심원 8명 앞에서 "피고인은 농수로에 쌓아 올린 모래 포대가 물살에 떠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공사 후에 남은 폐석이라고 생각해 돌덩이를 가져갔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날 오후 5~6시에 배심원들이 평결한 유무죄와 형량을 참고해 선고할 예정이다.

하지만 법원 안팎에선 이날 재판을 놓고 "배보다 배꼽이 큰 재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피고인이 물어야 할 벌금보다 배심원 수당이 훨씬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배심원들은 앞서 법정에 나온 배심원 후보 29명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됐다. 법원은 배심원들에게 한 명당 수당 12만원을 지급한다. 배심원 후보들도 6만원씩 받는다. 재판 당사자인 조씨가 내야 할 벌금의 4배가 넘는 222만원이 배심원 수당으로 나가는 셈이다.

절도 혐의로 기소된 조모(72)씨가 부인과 함께 법정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전주=김준희 기자

절도 혐의로 기소된 조모(72)씨가 부인과 함께 법정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전주=김준희 기자

일각에선 "벌금 집행을 미루기 위해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을 악용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은 "피고인이 상소한 사건에 대해 원심 판결의 형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형사소송법상 원칙이다. 국내에서는 1995년부터 약식사건에 확대·적용됐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해 10월 약식명령사건에 대해 이 원칙을 배제하는 형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을 앞세워 정식재판 청구나 상소를 남용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약식명령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한 고정사건은 1996년 전체 정식재판의 1.8%에서 2015년 10.8%로 치솟았다. 하지만 대한변협은 "실질적인 정식재판청구권을 보장하는 보완 조치 없이 폐지는 부당하다"며 반대하고 있다.

이에 전경호 전주지법 공보판사는 "비용이 들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재판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라며 "앞으로 생활밀착형 사건에 대해서도 국민참여재판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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